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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Nov 09. 2015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 - 풍환의 교토삼굴

사마천 사기 맹상군 열전

리는 살아가면서 만일을 대비한 Plan B를 만들어 두라는 말을 하곤 한다.


사기(史記)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을 읽다가 접한 '교토삼굴 ; 교활한 토끼는 3개의 굴을 판다'는 고사야 말로 Plan B의 생생한 예라고 판단되어 소개한다.




풍환(馮驩)은 제(齊)나라 재상(宰相) 맹상군의 식객(食客)이었다. 


맹상군은 왕족인 정곽군(靖郭君) 전영(田)의 아들로 이름은 전문(田文)이고, 맹상군은 그의 호이다. 풍환은 본디 거지였는데 맹상군이 식객을 좋아한다는 말에 짚신을 신고 먼 길을 걸어왔던 자다. 맹상군은 그의 몰골이 하도 우스워 별 재주는 없어 보였지만 받아주었다.        


그러나 그는 괴짜였다. 맹상군은 그를 3등 숙소(宿所)에 배치했는데 고기 반찬이 없다고 늘 투덜댔다. 
그래서 2등 숙소로 옮겨 주었는데 이번에는 수레가 없다고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1등 숙소로 옮겨 주자 그럴 듯한 집이 없다며 투덜댔다.        

맹상군은 '참 독특한 사람일세..'라며 혀를 끌끌 찼다.


당시 맹상군은 설(薛:현재 山東省 동남지방)에 1만 호의 식읍을 가지고 있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땅이었다.


3천 명의 식객을 부양하기 위해 식읍 주민들에게 소작을 시키고 있었는데, 몇 년 동안 흉년이 들자 제대로 수확된 농산물을 갖다 바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소위 연체 상태.

맹상군은 채권 추심이 필요했다.

과연 누구를 보내 독촉할까 궁리하다가, 1년 동안 뚜렷한 실적 없이 놀고 먹는 풍환에게 이 일을 시켜보기로 했다. 

풍환은 명령을 받고 출발할 때 맹상군에게 물었다.


“빚을 받고 나면 무엇을 사올까요?” 


맹상군은 “무엇이든 좋소. 여기에 부족한 것을 부탁하오.”라고 대답하였다. 당시 맹상군의 집에는 없는 게 없었는데 말이다.


설 땅에 당도한 풍환은 빚진 사람들을 모아서 차용증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았다, 상당한 액수의 미수금이 남아 있었다. 

풍환은 차용증을 다 모은 뒤 사람들에게 말했다. 


“맹상군께서는 흉년으로 여러분이 고생하시는 것을 어여삐 여기시어 모든 채무를 면제하라고 나에게 분부하셨소.” 


그리고는 모아 놓았던 차용증 더미에 불을 질렀다. 차용증은 모두 재로 변하고, 사람들은 그의 처사에 감격해마지 않았다. 




설 땅에서 돌아온 풍환에게 맹상군이 “선생은 무엇을 사오셨는가?” 하고 물어 보았다. 

이때 풍환이 말하기를 


“차시풍환왈 군지부족즉은의야 이소차서위군매은의래

(此時馮驩曰 軍之不足則恩義也 以燒借書爲君賣恩義來)"


당신에게 지금 부족한 것은 은혜와 의리입니다. 차용증서를 불살라 당신을 위해 돈주고 사기 힘든 은혜와 의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라 하였다. 

아니 빚을 받아오랬더니, 그 빚을 모조리 탕감해주고 왔다고? 맹상군은 매우 마땅찮은 기색이었다.            



1년 후 맹상군이 제나라의 새로 즉위한 민왕(泯王)에게 미움을 사서 재상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3천 명의 식객들은 모두 뿔뿔이 떠나버렸다. 

맹상군은 떠나버린 식객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남은 식객은 딱 한 명, 풍환.

풍환은 그에게 잠시 설 땅에 가서 살라고 권유했다. 

맹상군이 실의에 찬 몸을 이끌고 설에 나타나자 주민들이 환호하며 맞이했다. 


맹상군이 풍환에게 말했다. 


“선생이 전에 은혜와 의리를 샀다고 한 말뜻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소.”        


“교활한 토끼는 구멍을 세 개나 뚫지요[狡兎三窟 ; 교토삼굴]. 지금 경(卿)께서는 한 개의 굴을 뚫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아직 고침무우(高枕無憂: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 없이 잠.)를 즐길 수는 없습니다. 경을 위해 나머지 두 개의 굴도 마저 뚫어드리지요.”        



맹상군과 풍환


풍환은 이어 위(魏)나라의 혜왕(惠王)을 찾아갔다.


혜왕에게 '왕께서 설득하여 맹상군을 등용하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실현할 것이며 동시에 제나라를 견제하는 힘도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마음이 동한 위의 혜왕은 금은보화를 준비하여 세 번이나 맹상군을 불렀지만 그 때마다 풍환은 맹상군에게 응하지 말 것을 은밀히 권했다.        


이 사실은 제나라의 민왕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아차 싶었던 민왕은 그제서야 맹상군의 진가를 알아차리고 맹상군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다시 재상의 직위를 복직시켜 주었다. 

풍환이 준비한 두 번째의 굴이 완성된 셈이다.            




두 번째 굴을 파는데 성공한 풍환은 세 번째 굴을 파기 위해 풍환을 설득했다.


설 땅에 제나라 선대의 종묘를 세우게 만들어 선왕(先王) 때부터 전승되어 온 제기(祭器)를 종묘에 바치하도록 한 것이다. 솔직히 종묘를 세우고 관리하는 것은 상당한 비용이 드는 문제라서 맹상군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풍환은 이를 관철시켰다. 



풍환의 속마음은 선대의 종묘가 맹상군의 영지에 있는 한 설혹 제왕의 마음이 변심한다 해도 맹상군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이것으로 세 개의 구멍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주인님은 고침안면 하십시오.”        


이리하여 맹상군은 재상에 재임한 수십 년 동안 별다른 화를 입지 아니했는데 이것은 모두 풍환이 맹상군을 위해 세 가지 보금자리를 마련한 덕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풍환을 《戰國策》〈제책편(齊策扁)〉에서는 ‘풍훤(馮)’으로 적고 있다. 이 고사는 불안한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로, 완벽한 준비 뒤에는 뜻하지 않는 불행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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