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돈을 빌렸다. 정해진 기간에 돈을 갚지 못한다면? 이자를 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채권자가 원하는 것은 이자 따위가 아니다. 채무자의 가슴 살 1파운드. 채권자는 채무자의 목숨을 원하고 있다. 채무자는 주춤한다. 하지만, 어차피 1달 후면 엄청난 상품을 실은 배가 들어올 것이므로 충분히 갚을 수 있다. 차용증에 서명하는 채무자.
하지만 채무자의 배는 풍랑을 만나 침몰했다는 암울한 소식이 전해지고 정해진 변제 기한은 지나버렸다. 채권자는 차용증에 기해 소송을 제기한다. 약속대로 살 1파운드를 받아가겠노라고.
채무자의 친구는 법정에서 대신 사정한다. 원금의 3배, 아니 10배라도 주겠노라고. 채권자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당초 약속대로 법이 집행되기를 원한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이 사회의 정의 아닙니까!”라고 강조하면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은 유쾌한 이야기 속에 ‘계약’에 관한 본질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다. 안토니오는 자신의 친구인 바사니오의 청혼비용을 마련해 주기 위해 평소 인간말종이라고 여기던 고리대금업자인 유태인 샤일록으로부터 돈을 빌린다. 샤일록은 자신을 경멸하던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기괴한 페널티 조항을 넣게 된다. 돈을 못 갚으면 너의 가슴살 1파운드를 갖겠노라고.
모든 약속은 지켜져야 하는가?
“Pacta sund servanda.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법학개론을 수강했던 사람이라면 이 유명한 라틴어 법언(法諺)을 들어봤으리라. 약속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법질서의 가장 기본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계약과 관련된 유명한 법언 하나 더.
“Contract makes the law. 계약은 법을 만든다."
계약이 지켜져야만 하는 본질적인 근거. 자신이 ‘약속’을 했고, 상대방은 그 ‘약속’이 지켜질 것으로 믿었다. 이런 믿음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어찌 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겠는가.
민법
103조 -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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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사회정의 실현 위한 것
그렇다면 과연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약속대로 살 1파운드를 가질 수 있을까?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한때 유행했던 사채업자들의 ‘신체포기각서’를 떠올린다. 적어도 안토니오는 친구에게 청혼자금을 호의로 빌려주려 한 것이라는 점에서 사채업자에게 신체포기각서를 써준 사람들만큼 절박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안토니오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가능성이 더 큰 것 아닐까.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법이란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아무리 약속을 어겼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옳단 말인가? 계약을 다루고 있는 법이 민법이다. 우리 민법에는 제왕적인 조항, 즉 다른 조항의 효력을 뛰어넘는 조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민법 제103조다.
민법 103조 (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
즉, 당사자 간에 어떤 약속을 하든 원칙적으로 국가는 개입하지 않는, 하지만 적어도 그 약속이 사회의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위반한 것이라면 이를 무효화하겠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이 조항 때문에 당사자 사이의 ‘약속’은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 이런 제왕적 조항은 대부분 나라의 민법에 규정되어 있다.
결국 이 조항에 비춰볼 때,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계약은 무효다. 따라서 국가가 이러한 계약을 강제화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는 어떤 결론을 내리는가.
안토니오의 살을 베기 위해 얼굴에 득의양양한 웃음을 띠고 접근하는 샤일록에게 안토니오의 변호사(사실은 바사니오의 약혼녀인 포샤가 변장한 것)가 소리친다.
“이 차용증에는 살 1파운드만 가진다고 되어 있지, 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소. 따라서 피는 단 1방울도 흘리게 해선 안 되오. 만약 피 1방울이라도 흘린다면 당신은 계약을 위반한 죄로 베니스 법에 따라 재산을 몰수당할 것이오.”
차용증의 내용을 확인한 재판장도 변호사의 주장에 동의한다. 당황한 샤일록. 그는 그 때서야 차라리 원금의 3배라도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재판장. 샤일록은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분한 얼굴로 재판을 끝내고 만다. 해피엔딩.
민법의 제왕적 조항으로 차용증 자체를 무효화한 것보다는 훨씬 극적인 결론이다. 이렇듯 약속이라는 것은 일정한 한계 속에서만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한다고 했잖아? 그렇게 계약서에 쓰여 있잖아?’라면서 상대방을 압박하는 냉혹한 ‘갑’.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똘레랑스가 스며들어 있는 것이 우리 계약법의 근본취지임을 우리는 가끔 잊고 있다. 이를 잊거나 무시해 버린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가슴살을 내줘야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다. 그런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