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가장 유려한 문체를 자랑하는 소설가. 심지어 너무나 시적(詩的)이어서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는 이효석.
그의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메밀꽃 필 무렵』이다. 봉평부터 대화에 이르는 70리 길에서 벌어진 일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그려낸 단편.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의 공감각적(共感覺的) 문체가 극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메밀꽃 필 무렵은 장돌뱅이 허생원과 우연히 동행하게 된 젊은 장돌뱅이 동이의 이야기다.
왼손잡이요 곰보인 허생원은 재산을 다 날린 장돌뱅이로, 장이 서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떠돌아다닌다. 봉평장이 서던 날 같은 장돌뱅이인 조선달과 충주집에 들른 그는 우연히 젊은 장돌뱅이 동이가 충주댁과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고 질투심에 그를 나무라고 손찌검까지 한다.
그러나 자신의 당나귀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달려와 알려주는 동이의 마음씀에 화는 누그러들고 그들 셋은 대화 장까지 칠십 리 밤길을 동행한다.
달밤 봉평 메밀꽃밭 풍경 속에서 허생원은 젊었을 적 봉평 성서방네 처녀와의 하룻밤 인연을 이야기한다. 그 인연만이 그에게는 평생을 간직한 그리움이요 살아갈 힘이었다.
이어 동이도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의붓아버지 밑에서 고생을 하다가 집을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허생원은 개울에서 발을 헛디뎌 동이의 등에 업힌다.
등에 업힌 채, 그는 동이 모친의 친정이 바로 봉평이라는 것, 동이가 자신처럼 왼손잡이라는 것을 알고는 착잡한 감회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동이 어머니가 현재 살고 있다는 제천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발길을 옮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허생원이 동이의 생부(生父)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제천에서 온 가족이 반갑게 재회하는 장면을 기대할 것이다.
민법으로 본 『메밀꽃 필 무렵』
과연 허생원과 동이의 관계를 현행 민법의 잣대로 분석해보면 어떤 결과가 될까?
소설 속에서 허생원과 동이는 아무런 가족관계를 맺지 않고 있기에 법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여러 정황을 미뤄봤을 때, 허생원은 동이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제라도 둘 사이에 부자관계를 인정해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민법상 인지(認知)제도를 이용하면 된다.
인지는 혼인 외에 출생한 자녀에 대해 친아버지나 친어머니가 자기 자식임을 확인하는 일을 말한다.
인지에는 임의인지와 강제인지가 있다.
임의인지는 친부모가 ‘그래, 넌 내 아이가 맞다’라고 자발적으로 인정하는 경우다(민법 제855조).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친부모가 임의로 인지를 하지 않을 때는 자녀나 자녀의 법정대리인(주로 어머니)이 법원에 아버지로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는데 이것을 '인지청구의 소'라고 하고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인지를 '강제인지'라고 한다.
인지청구는 대부분 자녀가 아버지를 상대로 한다. 어머니를 상대로 하지 않는 이유는 어머니는 출산 자체로 어머니임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릴 적 헤어진 어머니를 상대로 인지청구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지청구를 한 후에도 부모자식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지가 중요한데, 다른 증거에 의해서도 친자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경우 법원은 검사받을 사람의 건강과 인격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당사자나 관계인에게 혈액형 검사나 그 밖에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검사를 받을 것을 명할 수 있다.
상대방인 아버지나 어머니, 아버지나 어머니가 사망한 경우엔 그 형제자매 등 친족들이 대상이 되며, 모근이 붙어있는 머리카락, 혈액, 구강상피세포, 손발톱 등이 유전자 검사에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검사명령을 받았을 때 "나는 절대 애 아버지(어머니)가 아니다!"라면서 검사받기를 거부하는 사례가 종종 있는데 정당한 이유없이 검사를 거부하면 1천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거나 30일의 범위 내에서 유치장에 갇힐 수도 있으니 거의 대부분의 아버지는 인지청구소송이 들어 왔을 경우 협조적으로 대응하는 편이다.
제천으로...
허생원은 제천에서 동이의 어머니를 만난 후 과연 어떻게 할까? 임의인지를 할까? 아니면 그러고도 모르는 척하자 동이의 어머니는 허생원을 상대로 인지청구의 소라도 제기할까?
나는 이 소설 말미에서 허생원의 마음을 엿본다. 아마도 모진 세월을 이겨낸 동이 어머니와 동이를 보듬어 안을 것 같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
"그래 모친은 아비를 찾지는 않는 눈치지?"
"늘 한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어디 계신가?"
"의부와도 갈라져 제천에 있죠. 가을에는 봉평에 모셔오려고 생각 중인데요. 이를 물고 벌면 이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죠."
"아무렴, 기특한 생각이야. 가을이랬다?"
동이의 탐탁한 등어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 더 업혔으면도 하였다.
"진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요, 생원."
조선달이 바라보며 기어코 웃음이 터졌다.
"나귀야, 나귀 생각하다 실족을 했어. 말 안 했던가. 저 꼴에 제법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말일세. 귀를 쫑긋 세우고 달랑달랑 뛰는 것이 나귀새끼같이 귀여운 것이 있을까. 그것 보러 나는 일부러 읍내를 도는 때가 있다네."
"사람을 물에 빠뜨릴 젠 딴은 대단한 나귀새끼군."
허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어. 나귀에겐 더운 물을 끓여주고, 내일 대화장 보고는 제천이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