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마천이 치욕적인 ‘궁형’이라는 형을 받았음을 알고 있다. 그 내막을 정리해 본다.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발전을 도모하고 있던 한 무제. 그 전까지 열세였던 흉노와의 대외관계를 역전시키기 위해 대(對) 흉노 정책을 ‘공세(攻勢)’로 전환함. 이에 따라 대대적인 흉노정벌 단행됨. 이 과정에서 무인 집안 출신의 이릉(李陵) 장군도 정벌에 나섬.
장수들 사이의 알력과 충돌 탓에 이릉 장군의 5,000결사대가 그만 적진 깊숙한 곳에서 고립됨. 당시 흉노의 군사는 3만 명이었음.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고사성어가 이 때 나옴,.
이릉 장군 군대는 몇 차례 승리를 거뒀지만 결국 5,000결사대 가운데 400명만 살아남음.
결국 흉노에 포로로 잡힌 이릉 장군도 항복하게 됨.
한나라 조정은 매국노 이릉을 성토하는 장으로 변함.
하지만 사마천은 ‘이릉은 중과부적으로 어쩔 수 없이 거짓항복한 것이며 그는 훌륭한 장수다’라고 변호함.
그런데 이 발언이 한무제를 분노케 함.
사마천은 여느 관리처럼 잔머리를 쓰는 그런 양반이 아니었음. 사마천은 이릉이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이릉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한나라 군의 작전 실패에 그 원인이 있었음을 지적함. 나아가 책임의 일부는 군 최고 사령관에게 있음을 지적.
문제는 군 최고 사령관이 한무제의 처남인 이광리(李廣利)라는 점.
한무제의 애첩 이부인(李夫人)의 오빠인 이광리 장군에 대한 비판은
곧 한무제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짐.
결국 괘씸죄에 걸린 사마천은 한무제에 의해 ‘황제를 무고한 죄’로 옥에 갇히고 마는데, 이 때 사마천의 나이 48세.
이후 상황도 사마천에게 불리하게 돌아감. 이릉이 흉노에게 병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헛소문이 돌았음.(첩첩산중, 설상가상)
화가 난 한무제는 먼저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킨 다음, 사마천에게는 사형을 명했음.,
당시 한나라 법에 따르면 사형을 면하는 방법은 두 가지 뿐임.
첫번째 방법은 목숨 값으로 50만 전을 내는 방안. 일명 속전(贖錢),
두번째 방법은 궁형, 한마디로 남성을 잃고 내시가 되는 것
궁형은 중국의 10대 혹독한 형벌 중의 하나. 궁형 외에 다른 9개의 혹독한 형벌은 육체적인 형벌에 그쳤지만, 궁형은 심리적, 정신적 고통까지 수반되는 치욕의 형벌이었음.
사마천은 속전을 감당할 돈이 없었다. 사나이로서 깨끗이 목숨을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마천은 궁형을 자처했다. 왜 그랬을까? 다름아닌 아직 완성하지 못한 <사기> 때문이었다.
궁형을 자청하던 때 사마천의 나이 49세(AD 91).
사마천이 51세 때 쓴 친구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그가 당시 얼마나 치욕감을 느꼈는지를 알게 해
준다.
하지만 사마천은 자신의 의지를 친구 임안에게 다음과 같은 명언으로 남김.
아홉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다는 ‘구우일모’(九牛一毛)의 죽음이란 얼마나 보잘것 없는가. 사마천은 같은 죽음일지라도 태산처럼 무거운 죽음을 택했다.
궁형의 치욕으로 이미 죽은 육신이지만 정신만은 오롯이 살아 청사에 길이 빛날 사서를 쓰겠다는 결심이 ‘대장부 사마천의 태산과 같은 선택‘이었다.
요즘이야 컴퓨터 자판으로 책을 쓰면 되지만, 당시 사마천은 52만 6,500자의 <사기>를 대나무를 얇게 오린 죽간이나 나무를 얇게 오린 목간에 일일이 붓으로 써야만 했음. 그것을 끈으로 연결하면 책(冊)이 되고, 이 책을 둘둘말면 권(券)이 되는 것임.
사마천은 42세이후 56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14년에 걸쳐 <사기>를 완성한 것으로 추정됨.
궁형을 계기로 <사기>의 세계관이 크게 바뀜. 궁형 전까지는 한제국과 한무제를 찬양하는 교향곡이었음. 하지만 궁형 이후 <사기>에는 한제국과 한무제를 비판하는 시각이 들어가게 됨.
특히 사회의 곪아 터진 부분과 권력층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하며 세태를 풍자했음.
작가 박경리씨가 '사마천'이라는 시를 쓴 사실, 잘 모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