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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Oct 20. 2015

호의의 대가가 이렇다니...

지인의 소개로 사무실을 찾은 60대 초반의 김순례(가명)씨.


일주일 전 저녁 8시 반경 그의 아들인 최호민(31세, 가명)씨가 자신이 근무하던 회사인 K사에서 근무 중 사망했다. 사망한 곳은 회사 건물 3층 계단. 경찰은 최씨가 계단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뇌진탕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K사는 반월공단 내에서 자동차 부품을 제조하는 직원 100여명 규모의 중소기업이고, 최씨는 그곳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K사는 최씨가 근무 중에 사망한 것이므로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산재) 처리를 신청했으며, 일정한 심사를 거친 다음에는 상당한 금액의 보험금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설명을 듣던 나로서는 변호사로서 도와야 할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호민씨의 일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법적으로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상황설명을 마친 김순례씨는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호민이가, 착한 우리 호민이가 자꾸 꿈에 나타나요.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막 울어요. 변호사님, 호민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호민씨가 계단에서 실수로 발을 헛디뎌 뇌진탕으로 사망했다는 회사나 경찰의 설명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믿지 못하겠고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는 김순례씨.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로서는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인(死因)을 밝히려면 피해자 유족은 경찰에 진정서 등을 제출해서 사인규명을 위한 절차를 정식으로 밟아줄 것을 요청할 수 있다. 그 이후에는 사체를 부검해서 법의학적인 사인규명 작업에 들어가고, 만약 그 과정에서 자살이 아닌 타살의 의심이 들 경우에는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될 수 있다.

사인을 밝힐 수 있는 절차를 자세히 설명하자, 김순례씨와 같이 온 딸인 최호순씨(33세), 즉 호민씨의 누나는 두 가지 걱정을 했다.


첫 번째는 ‘부검’을 한다는 것이 동생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서 괴롭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만에 하나 동생이 사망에 이른 경위가 지금처럼 근무 중에 실수로 발을 헛디뎌 사망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다면, 산업재해(산재)로 인정받지 못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산업재해보상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호민씨는 유족으로 부인과 2살 난 딸이 있고, 호민씨가 유일한 급여수령자였기에, 유족을 위해서는 산업재해보상금이 꼭 필요했다.


김순례씨도 이 두 가지 문제 때문에 그대로 덮어둘까 생각도 했지만 매일같이 꿈속에 나타나서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호민씨의 절규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가족들이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의논을 하고 최종적인 결론을 내려주면 그에 따르겠다고 설명했다. 다음 날 오전 최호순씨는 가족들의 뜻이라고 하고 호민씨의 사인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절차에 돌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변호사 보수를 묻기에 사건 자체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별다른 보수 없이 진행하겠다고 답변했다.



나는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사인을 규명해 달라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관할 경찰서에 제출했다. 

관할 경찰서 담당 수사관은 이미 다 끝난 일을 뭐하러 굳이 파헤치느냐면서 ‘변호사들이란...’라는 식의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이틀 후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사체 부검이 진행됐고, 가족은 그 과정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에 김순례씨와 최호순씨가 참관했다. 사실 사체부검 과정에 참가하는 것 자체는 너무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하지만 그 고통보다는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대부분 가족들은 사체 부검 현장을 참관하곤 한다.



사체 부검 결과 호민씨의 사인은 계단의 충격으로 인한 뇌진탕이 아니라 둔기로 인한 뇌진탕임이 드러났다. 자살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관할경찰서는 즉시 전담팀을 구성, 호민씨 사망 직전 2주간의 통화내역을 조사하고 직장 동료들에 대한 탐문수사를 시작했다.

수사가 시작된 지 불과 1주일 만에 호민씨 직장동료인 박모씨가 호민씨 사망 전에 자주 호민씨와 언쟁을 했다는 사실, 사고 당일도 점심시간에 둘이서 따로 식사를 했던 사실 등이 밝혀졌다.

수사관들은 박모씨를 긴급체포하여 30여시간 동안 강도 높은 수사를 벌였고, 결국 그의 자백을 받아냈다. 

사고 경위는 이랬다.



박모씨는 사채업자로부터 급전을 끌어썼다가 빚을 못갚게 되자 사채업자로부터 계속 독촉을 받게 되었다. 박모씨는 주위 직장 동료들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선뜻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박모씨는 사람좋기로 소문 난 호민씨에게 간곡한 부탁을 했고, 호민씨는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전세금으로 준비해 둔 3,000만 원을 빌려주었다. 물론 박모씨는 2달만 쓰고 갚겠다고 약속했고, 호민씨는 그 말을 믿고 빌려준 것이다.

급한 불을 끈 박모씨는 호민씨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전세 재계약을 위해서는 주인집이 요구하는 추가 전세금 3,000만 원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박모씨는 계속 호민씨의 요구를 피했다.


사건 당일도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민씨가 박모씨를 3층 계단으로 불러내서 언쟁이 시작되었다. 호민씨로서는 박모씨가 어려울 때 선뜻 도움을 줬는데, 박모씨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화가 날 대로 난 상황이었다. 박 모씨도 자신이 약속을 안지킨 것은 맞지만 너무 자신을 닦달한다고 생각해서 화가 나던 차에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듣게 되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 들고 있던 작업공구로 호민씨 뒷머리를 내려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호민씨는 쓰러져 있었고, 박모씨는 마치 호민씨가 계단을 헛디뎌서 쓰러진 것처럼 모양새를 만든 후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박모씨는 살인죄로 구속 기소되었다.

호민씨의 산업재해 처리는 결국 근로복지공단에서 기각되었다. 업무 중 사망한 것이 아니라 동료와의 금전문제로 인한 다툼 때문에 사망한 것이므로 ‘산업재해’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호민씨 유족의 입장에서는 약 1억 원 가량의 산업재해보상금을 날린 결과가 되었다.


“돈은 아깝지만 그래도 우리 호민이 억울함을 풀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이제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감사의 뜻을 전하는 김순례씨의 인사를 받으면서 나는 ‘과연 내가 잘 한 것인가’라는 애매한 마음이 드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만약 박모씨가 호민씨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호민씨가 이를 거절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박모씨는 호민씨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기는 했겠지만 호민씨를 죽이는 일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민씨가 박모씨에게 주었던 호의(好意), 선의(善意)가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섵부른 호의는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무섭고도 뼈아픈 인생의 단면을 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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