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꽤 기분 좋게 마셨다. 그 동안 애타게 기다렸던 대규모 입찰 건에서 최종 낙찰자로 결정되어 축하파티를 하게 된 고문기업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다녀오는 길이다. 이번 낙찰과정에 1등 공신 역할을 한 이사님과 이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사장님, 그 두분을 가만히 지켜보는 나는 ‘인연의 오묘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5년 전쯤이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배 이사로부터 K사를 소개 받았다.
“조 변호사님, 제가 볼 때는 K사가 너무 억울한 거 같아요. K사 사장이 제 후배인데, 잘 좀 부탁드립니다.”
나는 배 이사의 부탁으로 K사를 대리하여 상대방인 H사를 상대로 5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계약서 내용이 애매하게 되어 있어서 승소를 이끌어 내기란 만만치 않은 사건이었다. 나는 K사의 승소를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배 이사는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내게 세 번이나 따로 밥을 사면서 “조 변호사님 후배로부터 열심히 소송 진행해 주신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셔서 정의를 세워 주십시오!”라는 말로 은근히 부담을 줬다. 애매한 계약서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 상대방 H사 상무를 증인으로 불러 내서 2시간 가까이 혹독하게 증인신문을 했다. 그 증인신문이 결국 소송의 승패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었다.
K사의 1심 승소!
H사는 1심 판결에 불복하고 고등법원에 항소했지만 2심은 1심의 결과를 뒤집지 못했다. 결국 H사는 대법원에 상고하는 것을 포기했고, 그 사건은 K사의 승소로 확정되었다.
2년 전쯤, 어느 회사가 나와 고문계약을 체결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나는 약속된 시간에 회의 장소에 들어서면서 나를 기다리던 의뢰인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언젠가 만났던 사람이 분명한데 그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유쾌한 기억의 주인공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 의뢰인은 겸연쩍게 웃으며 내게 악수를 건넸다.
“저, 기억 나시나요? 그 때 증인석에서 저를 아주 호되게 몰아 붙이셨죠?”
아, 맞다. 내가 K사를 대리하여 치열하게 소송을 진행했던 상대방인 H사의 황 상무였다. 이 사람이 어쩐 일로 여기에?
“저희 사장님이 그 때 재판을 진행하는 조 변호사님 보면서 아주 깊은 받으셨나 봅디다. 그 사건에 패소해서 저희 회사가 아주 힘들었었죠. 중소기업에게 5억 원은 큰 돈이니까요.”
“아, 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갑자기 죄송하다는 말이 먼저 튀어 나왔다.
“그 뒤로도 몇 건의 소송이 있었는데 결과가 하나같이 신통치 않았어요. 그래서 사장님이 이번에 고문 변호사를 조 변호사님으로 바꾸고 싶다고 하시면서 저를 이렇게 보내셨습니다.”
아... 이럴 수도 있나? 패소의 쓴 맛을 안겨준 변호사와 고문계약을 체결하다니.
“사장님이 그러시더군요. 적으로 둘 바에는 차라리 우리 편을 만들어 버리자구. 허허. 그리고 저희 회사가 올해부터 계약 건이 많습니다. 도와주시죠. 고문변호사 계약 조건은 어떻게 되는가요?”
그래서 나는 얼떨결에 H사의 고문변호사가 되었다. 그 이후 H사를 방문하여 H사의 곽 사장과 인사도 나누었다. 과거의 소송이야기가 이제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안주거리가 되었다. 나도 내심 미안한 마음에 H사의 자문요청에 대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처리하고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특별히 시간을 내어 H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기업법무와 협상에 대한 특강도 여러 차례 진행했다. 덕분에 짧은 시간에 H사의 많은 임직원들과 친분을 쌓게 됐다.
1년 전쯤, K사의 소송 건을 내게 소개했던 배 이사가 급히 나를 찾아왔다. 배 이사가 다니던 회사가 급격한 유동성 위기로 인해 6개월 째 급여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대표이사는 거액을 챙겨 잠적해 버렸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난 셈.
“정말 송구합니다. 혹시 변호사님이 알고 계신 주위 기업 중에 저를 소개할 만한 기업이 있을까요? 워낙 사정이 절박하다보니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변호사님께 요청을 드립니다.”
나는 예전에 배 이사가 소송을 도와주었던 K사에 부탁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배 이사는 “세상 인심이 참 야박하더군요. 제가 그 때는 후배랍시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도와줬는데, 이번에 취직자리를 부탁했더니 완곡하게 거절하더군요. 제 나이가 이미 50이 넘었고, 아무래도 제가 사장의 선배라는 것이 K사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웠나 봅니다. 그렇다고 예전 일 들먹이면서 계속 고집을 피우는 것은 모양새도 안 좋고. 그래서…….”라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알아보겠다고 말은 했지만, 배 이사의 나이를 고려할 때 새롭게 취업을 한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 이사의 재취업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H사 황 상무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변호사님, 최근에 저희 회사 본부장이 자기 형이랑 사업한다고 갑자기 퇴직해 버려서 고민입니다. 50대 초반에 직장 생활 경험 풍부한 영업 본부장을 찾고 있는데, 혹시 주위에 괜찮은 분 없으십니까?”
흡! 나는 너무 놀라 순간 호흡을 삼켰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이렇게 말했다.
“아, 그러세요? 제가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능력도 출중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십니다. 저와는 10년 인연이신데, 제가 추천해 드릴만한 분입니다. 지금 근무하는 회사가 내부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있고 CEO의 모럴 해저드 문제도 발생해서 그 분 마음이 심란한 상태이십니다. 제가 한 번 작업해 볼까요?”
그러자 황 상무는 “조 변호사님이 추천하시는 분이라면 대환영입니다. 그 분께 말씀을 잘 드려주세요.한번 자리 마련해 주십시오.”라면서 아주 반가워했다.
나는 바로 그 날 저녁에 배 이사를 만났다. 그리고H사의 현황과 권력구도, 그리고 곽 사장의 성향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배 이사도 정말 반가워했다.나에게 부탁한 지 몇 일만에 취업의 기회가 생긴 것이니.
그런데 배 이사는 자신이 취업을 지원하는 H사가 예전에 K사와 소송을 진행했던 회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 때 배 이사는 사건 자체에 깊이 관여했다기 보다는 내게 사건을 잘 처리해 달라는 압력(?)만 행사했었기에 K사가 누구와 소송을 진행했는지 그 내용을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굳이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배 이사는 H사 곽 사장과 2차례 면접을 거친 후 H사의 영업 본부장(이사급)으로 영입됐다. 오늘 회식은H사의 배 이사가 진두지휘한 대규모 입찰 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어 이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전체 스토리를 모두 알고 있는 나로서는 어찌 묘한 감정이 들지 않겠는가.
불가에서는 어떤 일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직접적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그 결과를 내는 데 영향을 준 간접적 원인을 연(緣)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벼를 예로 들면 볍씨는 ‘인’이고, 논과,비료와 물과 태양과 공기와 농부의 노력이 간접적인 원인인 ‘연’이 되어 가을에 추수를 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배 이사가 H사의 영업 본부장으로 옮겨 갈 수 있게 된 데는 어떤 인연의 고리가 숨어 있었을까?
배 이사가 자발적으로 K사를 돕고 싶은 마음에 K사와 H사의 소송을 내게 갖고 온 그 장면이 인(因)이라 생각된다.
뒤이어 내가 그 사건을 맡아 열심히 H사를 상대로 싸웠던 점, 결국 H사에게 아픔을 줬지만 그런 나의 열성을 높이 평가한 H사가 나를 고문 변호사로 영입했던 점, H사의 전임 이사장이 자기 형과 사업한다고 H사를 떠난 점, 이 모든 것들이 간접적인 연(緣)으로 작용했던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