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가들은 협상에 임하는 당사자에게 그 안건에 관한 전권이 있어도 절대 상대방에게 자신이 전권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왜 그럴까?
협상은 하루아침에 완결되지 않는다. 협상 파트너끼리는 여러 차례 미팅을 갖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 인간적으로 친밀해 지는 경우도 있다.
인간적으로 친밀해지면 상대방의 제안에 대해 우리 이해관계만을 내세워 냉정하게 입장을 전달하기 어려워진다. 더욱이 상대방이 ‘어차피 이 사안의 결정권은 당신이 갖고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정말 부탁드립니다’라고 밀어 붙이면 참으로 난감해 진다.
이런 경우 ‘결정권이 저에게 있지 않습니다’라는 대응법은 유용한 퇴로(退路 ; Exit)가 될 수 있다.
협상가에게는 퇴로를 마련해 두는 지혜가 항상 필요하다. 이를 협상론에서는 ‘핑계대기 전술’이라 부른다.
협상가들은 이처럼 ‘저에겐 전권이 없어요’라면서 다른 이에게 협상타결 권한이 있다고 핑계를 댈 때에도 ‘특정한 직위에 있는 특정인’을 거론하면서 핑계댈 것이 아니라 모호한 대상을 거론하면서 핑계대라고 조언한다.
‘저희 상무님에게 전권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저희 마케팅 위원회에 상정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특정인을 상대로 추가 로비를 시도하려는 것을 사전에 봉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 전문가를 핑계의 대상으로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고문변호사의 검토를 받아야만 결정할 수 있다’는 식의 핑계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공기업의 경우 ‘아시잖습니까? 저희들은 감사를 하도 많이 받기 때문에 항상 결정을 내릴 때는 외부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야만 합니다. 저로서는 어떻게든 사장님과 좋은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방침이 그렇다 보니...’는 식의 핑계대기를 많이 사용한다.
협상전술 중 핑계대기가 유용한 전술이라고 설명하면 CEO들은 ‘내가 어차피 최종결정권자임을 상대방은 뻔히 알 텐데 나는 그럼 이 전술을 쓸 수 없겠네요?’라고 질문한다. 하지만 CEO라 하더라도 적절히 하급자를 거론하면서 핑계대기 전술을 활용할 수 있다.
빠른 납품을 독촉하는 거래 업체에 대해서 “네. 제가 충분히 사정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우리 공장 쪽 사정을 한 번 봐야 합니다. 요즘 공장 현장의 작업반장들에겐 사장 말이 잘 안 먹힙니다. 자기들 고집들이 다 있어요. 나 원 참. 누가 월급을 주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라니까요. 제가 지난번에도 정말 애를 먹었답니다...”라면서 하급자 핑계를 댈 수도 있다.
가. 조이기 전술과의 결합
상대방에게 ‘좀 더 성의를 보여 주실 수 있나요’라는 식으로 막판 조이기를 할 수 있다.
“제가 마케팅 위원회에 어떻게든 이야기를 잘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 회의 때도 그랬고 요즘 원가절감에 대한 압박이 아주 심합니다. 제가 볼 때는 이 제안 그대로는 통과가 힘들 것 같고 마지막으로 조금 더 인하하는 노력이 필요할 듯합니다.”
나. 굿가이 뱃가이 전술과의 결합
핑계대기 전술은 굿가이 뱃가이 전술과 결합될 때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사장님, 아시겠지만 저는 당연히 사장님과 이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그 동안 사장님이 제게 보여주신 신뢰를 생각하면 저로서는 사장님 같은 훌륭한 거래 상대방을 찾기는 힘들 겁니다. 그런데 우리 마케팅 위원회에는 그런 신뢰관계보다 어떻게든 낮은 가격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그게 문제입니다. 그런 위원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저에게 뭔가 더 무기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전 정말 사장님과 이 거래를 하고 싶어요.”
당신이 이런 화법을 구사하면 상대방은 당신이 자신과 ‘같은 편인 줄 착각하고’ 어떻게든 마케팅 위원회의 마음에 들 제안을 만들기 위해 같이 노력하게 된다.
상대방이 핑계대기 전술을 쓸 때는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을까? 협상전문가들은 보통 다음 두 가지를 제안한다.
가. 자존심 건드리기
상대방이 자존심이나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높게 추어주는 것이 좋다.
"아, 그러시군요. 결정권한이 위원회에 있었군요. 하지만 사실 이 안건애 대해서는 부장님이 가장 전문가시잖아요. 그리고 그 동안 그런 결정과정에서 부장님의 판단을 위원회가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경우는 많지 않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말에 대해 상대방으로부터 “뭐, 그야 그렇지만...”이라는 반응을 얻어낼 수 있다면 거래가 성사될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나. 조건부 마무리
일단 나중에 결정이 뒤집어 질 경우는 감수하겠으니, 현 단계에서는 조건부로 일단 마무리하자고 강하게 나가는 방법이다.
“아, 그러시군요. 결정권한이 위원회에 있군요. 만약 위원회에서 그동안 부장님과 제가 힘들게 조율해왔던 이 제안을 완전 뒤집어 버린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하지만 저로서도 그 동안 힘들게 협상해 온 마당에 어떤 결과물이라도 가져가야만 체면이 설 것 같습니다. 제 입장도 충분히 이해해 주실 수 있죠? 그래서, 나중에 위원회에서 전면백지화 결정이 나면 취소한다는 전제하에 일단 간략히 합의서를 쓰시는 것은 어떨까요? 뒤에 얼마든지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드라이브 역시 상대방의 무책임한 핑계 주장을 무력화시키는 좋은 방어수단이 될 수 있다.
팡계대기는 자신에게 권한이 있음에도 권한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인데 반해, 자신에게 권한이 없음에도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전술을 ‘허위권한 전술’이라고 한다.
모스크바에 파견된 한국인 상무관은 두 나라간 산업협력 문제로 러시아 산업관련 부처의 국장을 만나 며칠간의 협상 끝에 겨우 그를 설득했다. 그런데 그 러시아 국장이 하는 이야기가 "나는 이 문제 에 대한 결정권한이 없으니 우리 부처 차관을 설득해라"였다.
그래서 겨우 차관과 다시 협상을 하고 나니 그 차관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러시아 에너지 관련 부처가 최종결정권을 갖고 있다"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상무관은 실제 협상권한이 없는 산업관련 부처의 차관, 국장과 협상하는 데 며칠을 허비해 버린 것이다.
러시아나 제3세계 정부 관료가 흔히 하는 행동이다.
물론 이런 일은 대개의 경우 관련부처간 또는 같은 부처 내부에도 실제 업무분담이 명확하지 않아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협상과정에서 부정한 이익이나 접대 등의 반사적 이익 등을 기대하면서 이러한 허위권한술책을 쓰는 경우가 있다.
허위권한전술에 대해 대응하기 위해서는 협상 전에 반드시 "상대가 어느 정도의 의사결정권한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지 못하면 나중에 ‘헛 고생했네’라는 허탈한 입장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