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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Dec 29. 2015

집에 법률적인 문제 없습니까?

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살다보면 여러 부탁을 받게 된다. 손쉽게 들어줄 수 있는 부탁부터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 부탁까지 그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부탁 받는 난처함보다 부탁하는 난처함이 더 큰 법인데, 상대방 입장을 잘 이해해 주지 못하고 부탁을 받은 것에 짜증내기도 한다.

부탁을 받았을 때의 '남다른 대응'이 때로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변호사님. 중학교 동창이라는데요?”

비서가 바꿔 준 전화.     


“조우성? 나... 기억할는가 모르겠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했던 영춘인데, 황영춘!”

** 물론 이 이름은 가명입니다. **


영춘이, 영춘이..

되뇌어 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돌아서면 까먹는 내 메모리 용량을 자책했다.     


“아~ 영춘이. 기억나지! 야, 이게 얼마만이냐?”

설레발을 치며 대화를 이끌어 가다보면 뭔가 단서가 나오리라 생각했다.      


25년 만에 연락을 해 온 별로 친하지 않은 중학교 동창. 

법적인 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걸까...

빨리 법원에 제출해야 할 서류를 작업하던 중이라 마음이 급했다. 친구가 빨리 용건을 말해주길 바랬다.     


“그래. 부모님들은 다 잘 계시나?”

“응. 서울에 같이 모시고 살고 있어. 영춘이 넌 어르신들 잘 지내시나?”

용건 빨리 말해주라. 친구야.     


“그래. 애들은 어떻게 되냐?”

“응... 난 딸만 둘이다. 영춘이 넌?”

“야, 공부 잘하는 우성이도 아들 낳는 기술은 없나 보네. 단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래, 용건이 대체 뭔데, 친구야?     


한참 빙빙 둘러간 후에야 용건을 말하는 친구.


영춘은 원래 건설 자재 쪽 사업을 하다 거래업체가 부도나는 바람에 사업이 망가지고 빚을 지게 되었다. 

이 일 저 일 하다 지금은 공기청정기 렌탈 영업을 하면서 팀장직을 맡고 있었다.



“내 밑으로 팀원이 5명 있어. 내가 팀장이긴 한데 나도 영업을 해야 해. 주위에 아는 사람 전부에게 영업하고 나니 더 이상 영업할 사람이 없네. 그래서...”     


영춘의 부탁 요지는 내 주위 아는 사람들에게 공기청정기 렌탈을 소개해 달라는 것.


“아무래도 넌 변호사니까 주위에 사무실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 우리 회사 제품이 괜찮은 편이야. 렌탈이라 월 3-5만 원 정도 부담하면 되는데...”     


영춘은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몇 달째 실적이 없어 자칫하다가는 팀장 자리도 내놓아야 할 판이야. 팀장으로 있으면 월급 외에 수당도 나오는데. 지금은 한 푼도 아쉬운 때라...  팀장자리 유지하려면 내가 기본 실적은 올려야 해서...”     

공기청정기라...


나는 영춘에게 그 회사 제품 특장점이 무언지, 그리고 모델명과 구체적인 렌탈 조건 등을 물어서 메모했다.


영춘은 오후에 기어이 내 사무실로 오겠단다. 나는 굳이 오지 않아도 내가 알아보고 연락을 준다고 했으나 영춘은 미안한 마음에 인사라도 하고 싶어하는 듯 했다. 나는 그러라고 했다.




영춘의 전화를 끊고 휴대폰에 있는 전화부의 이름들을 들쳐보았다. 편하게 부탁할 만한 사람을 물색하기 위해. 

내가 그 동안 무료로 법률상담을 해줬던 사람들이 먼저 떠올랐다. 

나도 예전에 도와줬으니 이럴 때 부탁 좀 해야지 라는 얄팍한 계산을 하며.  


“김 사장님. 안녕하세요! 조 변호사입니다.”

“아, 조 변호사. 오랜만이네. 연락이 뜸했어요. 언제 골프나 한번 쳐야지?”

“공기청정기 필요 없습니까?”

“잉? 공기청정기?”     


몇 달 전 처제 전세금 문제로 상담을 요청해서 해결책을 알려줬던 김 사장.

시간이 많지 않아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얘기했다. 아울러 공기청정기가 왜 필요한지 인터넷으로 검색한 내용을 근거로 보충설명도 했다.     


김 사장은 내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조 변호사 부탁이라면 해야죠. 우리 사무실에 2대 놓겠습니다.”

오호! 감사합니다.     


나는 대 여섯명에게 전화를 걸어 ‘단도직입 화법’으로 공기청정기를 추천했다. 

마음에 일말의 부담감이 있었는데 그래도 다들 선선히 부탁을 들어줬다. 

30분 만에 10대를 예약했다.


와우! 그 동안 헛살지 않았군.

뿌듯했다. 


예약자 명단과 연락처를 정리했다.     




오후에 사무실로 방문한 영춘. 

얼굴을 보니 어렴풋 기억이 났다. 

친구간이지만 부탁을 하러 온 입장에서는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나는 학창시절 얘기를 좀 하다 고객 명단이 적힌 종이를 건넸다.


“영춘아. 내가 편하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들이거든. 그래도 마음 바뀔 수 있으니 오늘 오후에 전부 전화 걸어서 확정지어라.”


영춘은 종이를 받아들고는 “아니, 이렇게나 많이...”라며 놀라워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변호사 일 하다보면 다른 사람 부탁 들어줘야 할 때가 있거든. 이럴 때 부탁 쿠폰 쓰는 거지 뭐.”     



“내가 이렇게 친구에게 민폐만 끼치네.”

“아이구 무슨 말씀. 괜찮다. 돕고 사는 거지. 내가 이번 주까지 계속 부탁 쿠폰 발행해볼게. 그리고 내 사무실과 집에도 하나씩 놔줘.”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려 너스레를 떨었다. 친구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25년 만에 중학교 동창에게 이런 부탁을 하려고 전화한 친구의 마음이 어땠을까. 

행여라도 마음 다치지 말도록 해야겠다고 조심했다.     


친구를 돌려보내고 나서 이틀 동안 부탁 쿠폰을 신나게 발행했다. 추가로 15대 정도 더 예약할 수 있었다.


내 문제가 아니라 내 친구가 하는 거라고 말하면서 부탁하니 오히려 더 마음이 편했다. 

‘친구를 위해 이렇게 발벗고 나선다니 참 보기 좋군요’라는 칭찬까지 들었다.     




며칠 후 저녁에 퇴근하는데 영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변호사. 자네가 지금 로펌에서 근무하잖아? 그러면 내가 주위 사람들 사건 있을 때 자네를 소개해 주면 도움이 좀 되나?”

“그야... 당연히 도움돼지. 어차피 변호사도 고객을 발굴해야 하니.”


“사건을 로펌에서 진행해도 자네에게 개인적으로 도움 된다는 거지?”

“내 실적으로 잡히니까.”


“그런 거였군. 그래, 알았다!”     


그 이후 나는 영춘의 소개로 연락한다면서 다양한 사건의 의뢰를 받게 되었다.     


“조변호사님이시죠? 황영춘 팀장 소개로 전화 드립니다. 저희 회사 직원이 경쟁사로 스카웃돼 갔는데요, 이런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요?”     

“황영춘이가 제 후배인데, 조 변호사님 실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칭찬을 많이 하더라구요. 납품해 놓고 못 받은 돈이 3억 원이라 이걸 소송으로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상담하면 될까요?”     


공기청정기 렌탈 영업을 못해서 쩔쩔 매던 친구는 갑자기 유능한 법률사무소 사무장으로 변신했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영춘은 만나는 사람마다 “혹시 법률적인 문제 없습니까? 제가 정말 잘 아는 유능한 변호사가 있는데...”라며 말을 꺼냈다는 것. 

내가 ‘공기청정기 필요 없습니까?’라는 단도직입 화법을 썼듯이.     


연말에 1년간 수임실적을 정산해 봤더니 영춘의 소개로 수임한 사건이 전체 사건 대비해서 건수로 30%, 금액으로 40%에 달했다. 


공기청정기 렌탈을 조금 도와준 셈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불공정 거래를 한 셈이다.     




영춘은 1년 후 그 일을 그만두고 원래 전공인 건설 자재 쪽으로 다시 뛰어 들었다. 선배가 하는 일을 도와주기로 한 것.


1년에 술을 열 번도 안 마시는 나와는 정반대로 1년에 300일 술을 마시는 영춘.     

그는 요즘도 계속 나대신 밤에 술을 마시며 열심히 영업하고 있다.


“혹시 집에 법률적인 문제없습니까? 제가 정말 잘 아는 변호사가 있는데...”     


친구야, 고맙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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