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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Dec 30. 2015

경고장보다 강력한 그것은?

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환지를 살피고 문진(問診)한 후 약을 처방한다. 같은 증상이라도 환자마다 다른 약을 처방한다. 그리고는 지속적으로 약에 대해 거부반응이 없는지 살펴보고 처방의 적정성을 판단한다.

같은 증상이라고 같은 치료법만을 고수하는 의사는 무책임하거나 실력 없는 의사이리라.


그럼 변호사는 어떤가?

같은 문제 상황에서는 같은 대응법, 솔루션만 있는 걸까.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

내 의뢰인이 겪는 문제는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비롯된다. 의뢰인의 성향과 상대방의 성향에 따라 여러 가지 조합이 나올 수 있기에, 그에 따른 대응책도 변화무쌍해야 한다.

변호사는 그런 섬세한 결을 골라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어려운 직업이다.


7년 전 어느 사건이 떠오른다.     




대학 친구가 전화로 여동생 일을 부탁했다.      


그녀는 의정부시에 있는 건물 2층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했는데 남편이 대전으로 발령이 나 이사를 해야 했다. 마침 임대차계약 기간(2년)도 만료되어 건물주에게 나가겠다 말하고 짐을 뺀 뒤 대전으로 이사할 집의 계약도 마쳤다.


원래대로라면 건물주가 보증금을 내줘야 하는데 ‘다음 사람 들어오면 그 사람에게 보증금 받아가라’며 협조를 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돌려받아야 할 보증금이 4,000만 원이예요. 그 보증금과 은행대출금을 합해서 대전 집의 중도금과 잔금을 내야 하거든요. 건물주가 보증금을 안 내주고 있으니 2주 내에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계약위반으로 대전집 계약금 2,000만 원을 날릴 판입니다.”     

친구 여동생 김유승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몇 번 항의를 했는데 사람을 무시해요. 변호사님 명의로 강력한 경고장을 써서 건물주에게 보내면 뭔가 움직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복잡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임대차계약기간이 끝났고 건물을 비워 줬는데도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임대인을 상대로 경고장을 작성하면 된다.     


“네, 알겠습니다. 급하신 것 같으니 바로 경고장 작성해서 저희 사무실 명의로 내용증명 발송토록 하겠습니다.”     


나는 상담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20분 만에 경고장을 작성한 뒤 비서에게 내용증명 발송을 지시했다. 그리고는 같은 층 동료 변호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      




“경고장 잘못 보냈다가 문제가 완전 꼬여버렸네요. 젠장...”   

  

부동산 팀 정 변호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의뢰인 요청으로 손해배상 및 형사고소를 하겠다는 변호사 명의 경고장을 보냈는데, 상대방 자존심을 건드리는 바람에 감정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의뢰인 입장에서는 장기전을 펼쳐야 할 상황이 되었다는 것.     


“경고장 보내면 겁먹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고 말았어요.”


듣고 있던 선배 박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경고장도 사람 봐가며 보내야 해. 경고장이 먹히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도 있으니. 의뢰인 하자는 대로 했다가 일이 꼬여도 욕먹는 건 변호사라구.”     


앗차!

나는 급히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민씨! 아까 내용증명 발송하라고 했던 거, 우체국에서 발송했을까요?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 가서 발송보류한다고 하고 찾아오세요.”     


경고장을 받을 사람의 성향을 전혀 파악하지 않고 경고장을 보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유승씨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에 다시 사무실로 와달라고 했다.     




“아까는 너무 간단히 상담을 했는데요, 이 사건 처음부터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건물주는 어떤 사람인가요?”     


피아노 학원 건물 1층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건물주는 50대 후반의 남성으로 동네 반장이라 무슨 문제만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재를 하는 스타일. 술을 특히 좋아하고 조기 축구회도 열심히 다닌단다. 검소한 성격에 작은 건물이 하나 더 있고 지방에는 땅도 꽤 갖고 있다고 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게 유승씨의 설명.


“처음 입주했을 때 건물주와 관계는 어땠나요?”


“건물주 사장님과 처음에는 잘 지냈죠. 자기 건물에 피아노 학원이 들어와서 건물의 격이 높아졌다면서. 학원에도 한 번씩 들러서 필요한 게 없나 체크해 보기도 하고...”     




유승씨가 그 건물을 선택한 것은 건물이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는 점 때문이었다. 건물주의 부지런한 성격이 한 몫을 했다.

유승씨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건물주와 사이에 틀어진 계기가 있었네요. 자주 학원에 내려와서 살펴봐 주는 것은 좋은데, 잠바 걸치고 와서 피아노를 뚱뚱 거리는 일이 몇 번 있었어요. 다른 뜻이 있어 그런 건 아니었지만 학생들 보기에 좀 그랬죠. 전 나름 학원의 분위기를 프리미엄급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인테리어도 신경을 많이 썼거든요. 어느 날 제가 정색을 하고 ‘앞으로 공적(公的)인 일이 아니면 여기 출입을 삼가해 주면 좋겠다’고 단호하게 말했죠. 음... 그 일 이후로 서로 인사도 안하고 지냈던 것 같긴 합니다.”     


“건물주가 왜 그랬을까요?”


“자기처럼 음악성 없는 사람도 피아노를 배울 수 있냐, 뭐 그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건물주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유승씨에게 말했다.     


“유승씨, 경고장을 보내는 것보다는 다른 식으로 접근하는 게 어떨까요? 경고장을 보내서는 오히려 문제가 더 복잡해 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변호사 이름의 경고장을 받으면 태도가 바뀌지 않을까요?”


“유승씨 말대로 건물주가 돈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어차피 줄 돈, 좀 늦게 준다고 생각하고 버티는 거죠. 그래봐야 이자정도 더 붙을 테니까요. 하지만 유승씨는 지금 당장 2주 내에 그 돈이 없으면 아주 곤란해지잖아요?”     


“하기야 돈 있는 사람에게 이자 정도 붙는 것 가지고는 겁을 안 먹겠네요.”     


“문제의 핵심은 건물주가 유승씨로부터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그래? 날 무시했어. 좋아’라는 억하심정을 가졌는데 유승씨가 돈이 필요한 상황이 되니 협조하기 싫어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내가 고민 끝에 내린 처방은 감사 편지를 전하자는 것이었다.     


“건물주가 건물관리 잘해 준 덕분에 그 동안 학원 잘 운영했잖아요. 그리고 남편이 좋은 데 발령도 났고. 건물주도 나쁜 의도로 학원을 들락거린 것도 아니구요. 그 동안의 감사마음을 담아 편지를 하나 써보시죠.”     

“그러다가 오히려 약점 잡히는 건 아닐까요?”


“만약 그래도 안 되면 경고장 보내고 소송하죠. 어차피 소송 시작하면 최소 6개월 이상 걸립니다. 유승씨는 당장 2주 내에 돈이 필요하잖아요.”     


유승씨는 그 날 저녁 집에서 감사의 손편지를 썼다.


막상 쓰다 보니 건물주에게 고마운 점도 생각이 나더란다. 편지만 전하기가 좀 그래서 학원생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품권 3장을 같이 포장해서 다음 날 건물주를 찾아갔다.


1층 슈퍼마켓에 들어서는 유승씨를 보고 건물주는 흠칫 경계를 했지만 유승씨는 편지와 상품권을 건네고 ‘그 동안 감사 했습니다’고 인사하고는 유유히 슈퍼마켓을 빠져나왔다.     




과연 어떻게 됐을까?

유승씨 못지않게 초조한 건 나였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라는 이솝 우화식 처방이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결론 날 지 궁금했다.     




유승씨가 감사 편지를 전하고 나서 사흘 뒤 건물주는 유승씨에게 보증금 4,000만 원과 이사비조로 50만 원을 얹어 입금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건물주는 참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계약을 무사히 치르게 된 유승씨는 내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나는 그 날 이후 동료들에게 거드름 피우면서 자랑을 할 레파토리가 하나 늘었다.


“다들 들어는 봤냐?
경고장 보다 강력한 감사편지라고.
드라마 같은 얘기 하나 들려줄까?
변호사는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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