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우성 변호사 Dec 30. 2015

'갑'과 '을'은 돌고 도는 것



'갑', '을'로 사람사이의 관계를 분류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갑은 을을 핍박하고 을은 갑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사람들은 그런 갑 때문에 분노하고 을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갑, 을 관계는 상대적인 것. 

어느 관계에선 갑이었던 사람이 다른 관계에서는 을이 될 수밖에 없다.


갑과 을은 서로 순환하는 것이라, 나도 을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고 상생(相生)하려고 노력함이 바람직한데,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어 그러지 못하는 것이 부인하기 힘든 현실이다.     




띵똥.


페이스북 메시지가 울렸다. 모르는 이름인데?     


‘저는 예전부터 변호사님 글을 즐겨보는 사람입니다. 기업 대상으로 혁신/마케팅 관련 강의를 합니다. 개인적으로 곤란한 일을 겪어서 그러는데 잠깐 상담할 수 있을까요?’     




메시지로 주고 받으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바로 전화를 달라고 해서 통화했다.     


김승우씨(40세)는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1인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서 1인 강사가 멋지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 그 삶은 고단하다.


1인 강사는 교육을 필요로 하는 기업으로부터 직접 강의 요청을 받기도 하지만 교육 에이전시 업체가 기업의 요구사항을 받아서 1인 강사들을 조직해 하나의 패키지로 제공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라고 한다.      


승우씨는 석 달 전 P라는 에이전트 업체로부터 요청을 받고 국내 굴지 대기업인 S사 직원을 상대로 ‘조직혁신과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5일에 걸쳐 하루 8시간씩 총 40시간 강의 및 워크샵을 진행했다. 


에이전트 업체로부터 시간당 15만 원, 합계 600만 원을 받기로 구두 계약했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 이 정도 금액이면 좋은 조건이었다. 승우씨는 보조강사를 개인적으로 추가 섭외했다. 보조강사들에게는 자기가 받는 돈(600만 원)에서 100만 원을 떼서 주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 모두 진행하고 600만 원을 다 받고 싶었지만 강의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승우씨의 월 평균 수입은 200만 원 정도. 그것도 불규칙적이었다. 


결혼이 늦었고 애도 들어서지 않아 승우씨 부부는 고민이 많았는데 작년에 임신이 되어 곧 출산일이 다가온다. 산후조리를 해 줄 어른들이 계시지 않아 산후조리원에서 몸을 풀기로 했다. 2주에 비용이 약 250만 원 정도.




더 싼 곳도 있었지만 승우씨는 와이프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고 싶었다. 출산관련해서 제법 비용이 든다. 승우씨는 그나마 S사 강의를 통해 500만 원정도가 확보된다는 것에 큰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궁핍한 사람의 계산은 치밀하고 정확하다. 

그 정교한 톱니바퀴의 아귀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대책이 없어진다.     



“강의하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하루에 8시간씩 닷새를 이어서 하면 정말 진이 빠집니다.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했습니다. 강의 후 평가도 5점 만점에 4.7점이라고 하더군요. 그럴 때 참 보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이전시가 돈을 안주는 겁니다.”     


이어지는 승우씨의 전화 통화 내용.     


S사는 교육비 집행을 빨리 하는 것으로 업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단다. S사가 에이전시인 P사에게 돈을 주지 않았을 리는 없다는 것. 강의를 마친 후 P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기에 승우씨는 2주를 기다리다 조심스레 P사에게 강사료 지급을 요청했다. 담당자는 “정산 중이니 잠시 기다리세요‘라는 간단한 답변만 했다.


승우씨는 보조강사들에게 이미 100만 원을 송금해줬다. 그들이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승우씨는 자꾸 돈 문제로 얘기하는 것이 자존심 상했지만 사정이 사정인지라 P사 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했다. P사 김대표는 “조금만 기다리세요. 정산 중에 있습니다.”라고 역시 짧게 답변이 왔다.


정산이라... 뭐 그리 정산할 것이 많단 말인지.     


그러다 문득 후배를 통해 P사 사정이 어렵고 작년부터 강사들의 돈을 떼먹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불안해진 승우씨는 체면 차릴 것도 없이 김대표에게 계속 전화를 했다. 김 대표는 그때부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담당자에게 연락을 했더니 담당자는 “이 건은 대표님이 총괄하기로 하셨으니 대표님께 직접 연락하시라”면서 발을 뺐다.


P사 사무실을 가보았더니 문이 잠겨 있었다.


승우씨는 머리가 하얘졌다. 백방으로 알아보니 P사는 다른 회사의 교육도 수주해서 멀쩡히 진행 중이란다.     



이대로 가다가는 돈을 못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승우씨는 주변에 아는 변호사를 찾아가서 법률 상담을 받았다. 

결론적으로 600만 원의 강사료를 P사에게 청구하는 사건.

사건 자체로는 그리 어려운 건이 아니다.      

상담을 받아본 변호사들은 대략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첫 번째, P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것.     


그런데 정식 소송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약식 소송인 지급명령 방식을 권했다. 지급명령 신청을 하고 상대방이 이의제기를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확정이 된다. 대략 소요기간은 3주 내지 1달.     

하지만 상대방이 이의를 제기하면 정식 소송으로 전환되어 비용과 시간이 추가로 들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돈을 주지 않으면 그 판결문(지급명령 결정문)으로 강제집행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도 또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이 방법으로 진행하는 데 변호사가 제안한 비용은 150만 원(물론 실비인 인세, 강제집행 비용은 별도)     




두 번째, P사 김 대표를 상대로 형사고소를 제기하는 것.     


처음부터 돈을 주지 않을 생각으로 승우씨에게 강의를 맡긴 것이라면 형법상 사기죄에 해당될 수 있다.      

다만 사기가 되기 위해서는 ‘P사가 처음부터 돈을 주지 않으려는 고의’를 입증해야 하는데, 요즘 경찰 분위기가 민사 문제는 민사절차를 통해 해결할 것을 원하지 형사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원치 않기에 고소장을 부실하게 써서 내면 아예 접수를 받아주지 않는단다.     


따라서 이런 상황 때문에 고소장을 제대로 작성해야 하는데 고소장 작성 및 형사절차를 도와주는 데 변호사가 제안한 비용은 200만 원.


다만 형사고소만 되면 문제가 빨리 처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는 것.     



‘민사, 형사 둘 다 진행하는 것은 비용에 부담이 커서 효과가 더 강력하다는 형사절차만 우선 진행하려고 결

정했습니다. 그런데 확신이 안서서 마지막으로 변호사님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 드려 봅니다.’     


전반적인 상황이 이해가 됐다.


에이전시 회사의 사정이 진짜 어렵거나 아니면 최대한 돈을 늦게 주겠다는 비양심적인 갑질이든가 둘 중의 하나이리라.     


“P사와 앞으로도 더 일을 하실 건가요?”


“아닙니다. 이번에 이렇게 하는 거 보고 다시는 같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P사와 더 이상 거래하지 않는다면 좀 세게 나가도 되겠군.     

승우씨에게 P사는 갑이겠지만 또 다른 관계에서는 을의 위치에 있지 않은가.     


“제가 하나 적어서 메시지로 보내드릴 테니 그 내용을 김 대표의 이메일, 문자, 카톡으로 보내세요.”

“그 사람 제 전화나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한번 해보시죠. 어떻게 나오나.”     


내가 작성해서 페이스북 메시지로 보내준 문안은 이랬다.      


“김 대표님께.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아 이렇게 문자로 보냅니다. S사 강의료 관련해서 자꾸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도 많이 급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표님이 S사로부터 돈을 받고서도 제게 주지 않을 리는 없을 테구요. 결국 S사가 문제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S사의 갑질에 얼마나 마음이 힘드셨습니까?

제가 알아보니 S사에는 윤리경영팀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에는 S사 각 부서의 갑질을 감시하는 일을 한다더군요. 제가 S사 윤리경영팀에 민원을 제기하겠습니다. S사 교육팀이 얼마나 갑질이 심한지. 그래서 P사가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나아가 그 일로 저같은 1인 강사의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과연 이것이 대기업이 갖춰야 할 상생의 모습인지 따지겠습니다. 아마 그 민원을 받고 나면 S사 교육팀은 혼쭐이 날 겁니다. 

제가 대표님을 대신해서 이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그 동안 재촉해서 죄송합니다. 건강하세요.“     


승우씨는 그 문안을 김대표의 메일, 문자, 카톡으로 다 발송했다.     

메시지를 보낸 지 정확히 30분 만에 김 대표로부터 문자가 왔다.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요즘 새로운 프로젝트 수주 때문에 바빠서요. 계좌번호 불러주세요.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석 달 동안 전전긍긍하던 문제가 이렇게 풀리다니.


김 대표는 앞으로도 S사와 계속 거래를 해야 하는데, 승우씨로부터 저런 민원이 들어가면 S사와 거래는 물건너 갈 것이 뻔하다. 김 대표가 가장 아쉬워 할 부분을 건드리니 문제가 해결된 것.


승우씨는 내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사례를 어떻게 해야 할는지...”     


아, 가장 어려운 비용 청구하는 문제.     


5분 정도 통화하고 문안 만드는 데 10분. 이거 했다고 돈 받기도 좀 그렇고.


“괜찮습니다. 저도 좋은 일 한 셈 치죠.”

“아닙니다. 경우가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나는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 이렇게 제안을 했다.     


“마케팅, 혁신 관련 강의를 하신다고 했죠? 그럼 제 고문기업에 한번 출강하셔서 2시간 정도 강의해 주시면 어떨까요? 저도 고문기업을 관리해야 하는데, 강의를 제공해 주면 제 체면도 살고, 또 고문기업이 승우씨 강의에 만족하면 추가 유료강의도 진행될 수 있을 테구요.”


“그거야 얼마든지요. 두 시간 아니라 네 시간도 좋습니다.”     


잘 됐다. 고문기업에 멋진 선물을 할 수 있겠군.     


아울러, 이번 일이 P사 김 대표에게 의미있는 참교육이 되었길 진심으로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경고장보다 강력한 그것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