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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Dec 31. 2015

계약 수정해 달라구요? 우린 그렇게는 계약 안합니다.

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출처 : 신간도서 "이제는 이기는 인생을 살고 싶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809067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들이 있다. 


이를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법은 약자(弱者), 소위 을(乙)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법을 잘 활용하면 약자도 얼마든지 상대방과 대등한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법의 내용을 잘 모르면서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상대가 시키는 대로 끌려가기만 하고 나중에 이를 원망하고 한탄한다. 


적절한 법 지식, 협상력을 갖추면 불리한 상황에서도 적절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G사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5개 도시 주요 거점지역에 대한 광고판 운영권을 갖고 있는데, 이 중 서울 지역에 관한 광고판 운영의 위탁경영을 맡길 업체를 선정하기 위한 입찰을 진행했다.


여러 업체가 입찰에 참가했는데 서류 심사 및 프리젠테이션을 거쳐 최종적으로 D기획(주)이 낙찰받았다.

D기획으로서는 업계에서 입지를 한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G사는 D기획에게 업무위탁 계약서 초안을 보냈다. D기획이 계약서 초안을 검토해보니 예상대로 여기 저기에 ‘갑질의 흔적’이 느껴졌다. 


과도한 위약벌을 부과하고 있고, 계약 갱신 여부는 전적으로 G사의 판단에 따르도록 하며, D기획의 사소한 계약이행 지연도 해제사항으로 정해 놓는 등 대략 5개 조항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D기획 법무담당자인 최하진 과장은 고문변호사와 상의 끝에 계약서에 대한 수정 의견을 작성해서 G사에 보냈다. G사 계약 담당자 박홍식 차장은 D기획의 의견을 받아보고는 곧바로 최 과장을 호출했다.     




“계약하기 싫으신 가요? 낙찰받았다고 무조건 계약체결하는 줄 압니까? 계약 조건이 우리와 맞지 않으면 낙찰 파기하고 다시 입찰할 수밖에 없어요.”


박 차장은 짜증나는 목소리로 계약의 문제점을 지적한 최 과장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 회사와 계약하면서 이렇게 계약 내용에 대해 평가질을 한 업체는 여기가 처음이예요. 어이가 없어서... 계약 조건이 마음에 안들면 계약 안하면 될 거 아닙니까?”     


최 과장은 계약이 날아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바짝 엎드렸다.

“앗, 차장님.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이런 큰 계약을 해본 경험이 없다보니 결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약서 초안대로 계약을 하게 되면 또 다른 문제를 묻어두고 가는 셈이다. 자칫하다가는 ‘승자의 저주’에 빠질 수 있다.     


특히 D기획은 계약이 체결되고 나면 계약 이행을 위해 최소 5억 원 이상의 신규투자를 해야 한다. 계약서 초안에 따르면 G사에게 너무 포괄적인 권한이 부여되어 있어 D기획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지적하자 박 차장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보세요. 우리 회사는 지금까지 5년 넘게 이런 계약을 하면서 단 한 번도 계약서 내용을 바꿔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이의제기를 안하구요, 그런데 왜 우리가 D기획에 대해서만 계약 내용을 수정해 줘야 합니까? 이 계약대로 하는 것이 우리 회사 방침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최 과장은 회사로 돌아와서 상황을 대표이사에게 보고했다.

D기획은 공동대표이사제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대표이사가 2명.


황 대표는 마케팅 전문이고 윤 대표는 재무/기획 전문이다. 


두 대표이사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황 대표는 어지간하면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좋은 게 좋다는 식의 관계지향적인 사람인 반면, 윤 대표는 따질 건 따지면서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편이다.


최 과장의 보고를 받고서도 두 사람의 반응은 달랐다.     


“다른 회사들도 문제 안 삼았다는데 우리만 유별나게 굴다가 G사에 찍히면 앞으로도 일 처리하는 데 문제가 많을 것 같구만. 그냥 G사 원하는대로 하자구.” 라는 황 대표.     


“우리가 선투자해야 할 금액이 큰데 이렇게 불리한 조항이 있는 상태 그대로 계약하는 건 아니라고 보네. 지난 번 00광고대행 건도 계약서 때문에 곤욕 치렀쟎나? 그새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힘들더라도 G사 담당자를 설득해서 독소조항들은 바꿀 수 있도록 하게.”라는 윤 대표.     


두 대표의 생각과 지시사항이 다르니 최 과장은 난감했다. 


까칠하게 계약서 수정사항을 거론했다가 계약이 문제되면 황 대표로부터 질책을 당할 것이고, 그냥 G사 원하는 대로 계약을 체결했다가는 윤 대표에게 무능한 직원으로 찍힐 것 같고.     




“이건 좀 많이 어려운 문제다. 넌 왜 어려운 일만 내게 갖고 오냐?”

오래간만에 나를 찾은 대학 후배 최 과장.     


“선배님, 쏘리입니다. 쏘리. 근데 진짜 진퇴양난입니다. 방법이 뭐 없을까요?”

“좋은 회사 법무팀에 있으면 사건도 좀 보내주고 그래야지, 이런 골치 아픈 숙제만 갖고 오고.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후배야. 넌.”


워낙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 객쩍은 농담을 주고 받았다.     


계약서 조항을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성해 놓고 안 바꿔 주겠다는 ‘갑’의 행태는 워낙 흔한 일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계약을 날리지 않으면서도
계약 조항은 적절히 수정해야 하는,
마치 지뢰밭에서 지뢰를 살살 피해가면서
목적지까지 도달해야 하는 미션.     

“자기네들은 딱 정해진 한 가지 계약서만 계속 써온다는 거지?”

“바꿔 본 역사가 없답니다.”


“거기서 주로 사용하는 계약서가 운영위탁 계약서고?”

“네, 자기들이 관리하는 장소의 광고판을 저희 같은 기획사가 운영하도록 맡기는 내용의 계약서입니다. 저도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독소조항 몇 개는 정말 심해요. 리스크가 크긴 큽니다.”     


“G사도 그런 식으로 계속 하면 본인들에게 안좋을 텐데.”


나는 한 가지 방법이 떠올라 최 과장에게 설명해 주었다.     


최 과장은 G사 박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장님. 지난 번 말씀을 듣고 내부적으로 결재를 하다 보니 저희 대표님들이 G사가 그 동안 정말 하나의 계약서를 통일적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 정확히 확인해 보라고 하셔서요. 간략히 그 내용을 메일로 좀 보내주시면 제가 결재를받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박 차장은 귀찮다는 목소리로 알았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도착한 박 차장의 메일.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다.     




‘당사가 위탁업체와 체결하는 위탁운용계약서는 별첨과 같은 방식이며, 이는 모든 거래업체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바, 개별 조항의 수정/보완은 당사의 방침과 부합하지 않음을 알려 드립니다.’     

딱 원하는 수준의 답변이 왔다.     




다음 날 최 과장은 박 차장을 찾아갔다. 부드럽지만 송곳 같은 반격을 위해.     


“차장님. 약간 변수가 생겼습니다. 저는 계약서 초안대로 계약하려고 했는데요, 저희 감사님이 문제를 제기하시네요. 법 위반이라구요.”     


“뭐라구요? 법 위반?”     


“네, G사는 그 동안 여러 업체와 운영위탁계약서를 체결하면서 딱 한가지 형식의 계약서만 사용했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럼 그게 일반 계약이 아니라 ‘약관(約款)으로 취급된데요. 왜 우리가 여행을 하거나 보험 들 때 깨알같이 작성되어 있는 거 말예요.”     


“아니 이건 계약이지 무슨 약관이란 말입니까?”     


“어느 일방 당사자가 작성하고 계속적,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계약조건이 있다면 이는 약관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학교 때 그렇게 배웠던 것 같구요. 어제 차장님이 메일로 그렇게 밝히셨잖아요. 그게 바로 약관임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하시더군요. 저희 감사님이.”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요?”     


“원래 약관은 약관규제법의 규율을 받는데, 결과적으로 그 내용이 갑과 을에게 공평하게 작성돼야 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약관은 무효가 된답니다. 지금 주신 계약서 초안 중 몇 몇 조항은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면 바로 무효가 될 거라고 하시네요.”     




최 과장은 박 차장 눈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더 문제는 지난 5년간 G사가 여러 업체랑 체결했던 계약도 약관이어서 전부 무효가 된다는 겁니다. 그럼 문제가 아주 심각해질 것 같더라구요. 하여튼 저희 감사님이 차장님 메일을 보시고는 그렇게 말씀을...”     


박 차장은 한동안 멍하니 있더니 이렇게 말했다.     


“난 그런 복잡한 얘기는 모르겠어요. 근데 지금 문제가 되는 조항이 무엇 무엇입니까? 불러보세요.”     


최 과장은 가장 독소조항이라 여기던 3개 조항을 거론했다.     


“알겠습니다. 이거 원칙적으로 안 되지만 제가 힘써서 수정하는 쪽으로 해볼게요. 대신... 감사라는 그 양반. 이 문제를 가지고 공정거래위원회나 이런 쪽으로 시끄럽게 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아..네. 그 부분은 제가 특별히 유의하겠습니다. 차장님, 정말 번거롭게 해 드려 송구합니다.”     


본인의 이메일 때문에 그 동안 G사의 모든 계약이 전부 약관으로 인정되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비화될 수 있다는 점을 박 차장이 깨달았던 듯.     



명분과 실리를 얻은 최 과장.     


“야, 이 정도면 내가 너희 회사 고문변호사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모양 빠지게 왜 이렇게 생색을 내려고 하실까. 후배에게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하세요.”     


“이 친구 보게? 이번 일 처리한 거 자네 아이디어라고 위에 보고했지?”

“선배 좋다는 게 뭡니까.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복 받으실 겁니다. 하하”     


이 친구가 다음에 또 숙제거리를 안고 찾아오면 그 땐 좀 비싸게 굴어야겠다고 굳게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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