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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Dec 31. 2015

어느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사건

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누군가로 인해 가슴 뜨거워지는 감정의 상태. 우리는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은 온전히 상대를 바라보고 상호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해야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일방적인 집착이나 망상을 보인다면 이는 과도한 자기애(自己愛)의 비정상적인 투영일 뿐이다. 




사람을 가장 벅차게 하는 것도 또한 비참하게 만드는 것도 뜨거운 마음의 열병(熱病), 그 놈 때문이 아닐까.     



홍세리씨(29세)가 전화로 상담을 신청했다. 어떤 건인지 힌트를 달라고 했더니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니라며 만나서 자세히 설명한다고 했다. 

세리씨는 내가 몇 차례 강의를 나갔던 어느 마케팅 포럼의 멤버. 나와는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눈 정도였다.      

“스토킹을 당하고 있어요. 그것도 아주 심하게..”     


32세 남성과 우연히 알게 됐는데, 몇 번 만나서 자연스레 대화도 하고 같이 차를 마시는 정도였는데 그는 조금씩 세리씨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리씨는 덜컥 겁이 나 어느 순간 연락을 피했다. 그러자 그는 하루에 10차례 이상 전화를 걸어 오고 수시로 집 앞에서 퇴근하는 세리씨를 기다려 깜짝 놀라게 한단다. 


    


나는 미혼 남녀들 간의 연애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해프닝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회의를 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세리씨는 두려운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변호사님. 아무래도 그 사람 일을 저지를 것 같아요.”     

가볍게 볼 문제는 아니구나.


“재판을 통해서 그 사람이 제 주위에 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던데요.”


“아. 접근금지 가처분을 말씀하시는군요.”     


나는 세리씨에게 접근금지 가처분에 관해 설명했다. 이혼소송을 제기하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게 이런 가처분신청을 많이 하는데, 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법원으로부터 승인받게 된다.     


방해자는 피해자의 100미터 이내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방해자는 피해자의 직장 및 사생활 등 모든 생활영역에서 간섭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피해자의 업무 또는 사생활에 방해가 되거나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방해자가 위 사항들을 어겼을 때는 1회 위반시마다 피해자에게 금 300만 원을 지급한다.     


세리씨는 내게 접근금지가처분 신청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가처분 신청을 하려면 남자가 세리씨를 상대로 스토킹을 한 증거자료들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세리씨는 자료를 준비할 수 있다고 했다.      


“남자 만나기가 참 무서워요. 제가 호의를 조금 베푼 것뿐인데, 그 남자는 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착각이란 이렇게 무섭네요.”     


나는 세리씨를 위로하고 자료가 준비되는 대로 가져다주면 바로 가처분 신청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나는 사무실에서 밀린 일을 처리 중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밤 11시 반. 세리씨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변호사님, 밤늦게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사무실입니다. 무슨 일이예요?”     


“그 사람이 제 집 앞에서 서성이며 절 기다리고 있습니다. 술에 취한 것 같은데, 무서워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아까 문자가 와서, 오늘은 꼭 자신을 만나달라고 했습니다. 오늘 마침 회식이라 다음에 연락하겠다고 했더니 무작정 집 앞에서 기다린다더군요. 아까 밤 10시쯤 전화가 와서는 취한 목소리로 ‘오늘은 끝장을 내자. 이판사판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칫하면 신체에 위해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 같았다.      


“세리씨, 일단 112에 신고하세요. 아직 그 사람이 세리씨에게 위협을 가한 것은 아니지만 위험한 상황이라고 설명하면 경찰관이 출동할 겁니다. 그래도 문제가 있으면 연락주시구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세리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제 말씀하신대로 112에 신고했더니 바로 경찰관이 와주셨어요. 경찰관이 오는 것을 보자 그 남자는 가버리더군요. 감사했습니다.”     


세리씨는 스토킹 자료를 들고 왔다.      


우선 통화내역.


밤 10시 이후에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내역이 많았다. 통화시간은 길어야 10초 내지 15초. 세리씨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것이라고 했다.      




그 다음으로 통화내용 녹음분. 


대부분 대화 중 일부만 녹음된 것인데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하면 차라리 내가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든가 “제발 만나달라. 오늘 저녁에 시간을 내달라. 집으로 찾아가겠다.”는 단편적인 내용들이었다.

앞 뒤 대화 내용은 사생활에 관한 것이라 일부러 삭제하고 문제가 될 발언들만 따로 모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세리씨 집 앞을 서성이는 그 남자의 사진들. 


가로등 밑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는 모습등이 멀리서 촬영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자료들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은 세리씨가 진술서 형태로 써주세요. 진술서 내용과 자료를 합쳐보면 그 남자의 스토킹이 자연스레 입증되겠습니다.”      




가처분을 신청하려면 상대방 남자의 주소를 알아야 한다. 혹시 그의 주소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집 주소는 모르고 회사 주소만 압니다. 회사 주소로 하면 어떤가요?”     


법원에서 보내는 우편물이 회사로 날아갈 경우 회사 직원들이 이를 알게 될 텐데. ‘접근금지가처분’이라는 이상한 재판의 피고(피신청인)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런 마음이 들었다.      



“법상으로는 꼭 집 주소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 사람 본인이나 그 지인이 제대로 서류를 받을수 있는 주소면 되거든요. 다만 그 사람 회사 동료가 그 서류를 받게 되면 이상한 소문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뇨, 오히려 그 편이 더 효과가 있을 겁니다. 회사로 그런 서류들이 가면 그 사람은 더 부담을 느끼겠죠. 회사로 꼭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럼 그렇게 하죠.”     


나는 상대방 남자의 명함을 건네 받아 기록 봉투에 넣었다. 

자료가 대강 정리되었으니 3-4일 이내로 마무리 작업해서 법원에 제출하면 될 것 같았다.      




그로부터 이틀 뒤 후배로부터 상담할 것이 있으니 시간 좀 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후배는 누구를 한명 데리고 왔다. 동행자 이름은 최현우. 훤칠한 키에 호남형 미남이었다.     


“선배님, 모임을 운영하다보니 별의 별 일이 다 생깁니다. 저희 모임 멤버들 간의 문제라 말씀드리기도 그렇고. 하지만 더 이상 뒀다가는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내가 몇 번 강의를 나갔던 그 마케팅 포럼의 운영자다.


후배의 말에 이어 최현우씨가 설명을 시작했다.      


현우씨는 마케팅 포럼에서 한 여성을 알게 됐다. 오프라인 모임도 가졌고, 그 여성의 제안으로 봉사활동에도 같이 갔었단다. 같은 모임 멤버였기에 특별히 경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중견 기업 오너고 자신은 무남독녀인데, 앞으로 그 기업을 물려받아야 해서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자기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자들이 있는데 모두 재산을 보고 그러는 것 같다 등등. 자랑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분간이 안됐습니다.

언제부턴가 느낌이 좋지 않아 연락을 피했죠. 사실 전 사귀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녀가 자신이 주관하는 봉사활동에 다시 한 번 더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제가 정색을 하고, 사귀는 사람이 있으니 앞으로는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겠다고 선을 그었죠.”     


그 후 그 여성은 수시로 현우씨에게 ‘나를 무시했으니 그냥 둘 수 없다’라든가 ‘왜 나같은 사람에게 도전해 보지 않느냐’는 등의 문자를 시도 때도 없이 보내기 시작했다. 현우씨 회사도 두어번 찾아갔단다.      


“사람을 깜짝깜짝 놀래키는 겁니다. 이건 아니다 싶더군요. 저를 만나러 저희 사무실로 왔다가 제 친구라고 속이고 제 자리에서 잠깐 저를 기다렸답니다. 그 때 제 책상 위에 있던 중요한 자료 하나를 들고 가버렸습니다. 그 자료는 다음 달 저희 팀 발표에 정말 중요한 백 데이터(back data)인데....”     


현우씨는 그 여성으로부터 자료를 받으려고 계속 전화를 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더니 자기 집 앞으로 오면 자료를 주겠다더군요. 주소를 알려줬습니다. 퇴근 후 집 앞에 가서 계속 전화를 해도 연락이 안되었습니다. 몇 번이나 허탕을 쳤죠.”     


옆에 있던 후배가 말을 이었다.


“뭐, 남녀간에 그럴 수 있다고 봐요. 이 친구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데 문제는 그 여성분이 우리 모임 멤버들에게 묘한 소문을 내고 다닌다는 겁니다.”     


“묘한 소문이라?”     


“네, 모임의 어떤 남자가 그녀를 스토킹 한다는 둥, 결혼해 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위협한다는 둥 하는 소문. 그녀가 현우씨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언급하는 간접적인 자료를 종합하면 우리 모임 멤버들은 그 남자가 현우씨라는 것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거든요.”     


현우씨가 문자를 하나 보여주겠다고 했다.      


‘나를 무시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 줄 거야.“     


나는 그 문자를 보낸 사람의 전화번호에 눈이 갔다.

010-5634-****


앗... 뭔가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


나는 좀 더 상황을 지켜보다가 만약 그녀가 또 그런 식으로 소문을 내면 명예훼손 고소 등의 방법을 쓸 수 있다고 얘기하고 서둘러 상담을 마쳤다.     


그들이 나가자 세리씨 사건 기록 봉투를 찾아 세리씨가 건네 준 명함을 살폈다. 

예상대로 그 이름은 최/현/우.

나는 세리씨가 의뢰한 접근금지가처분신청서의 법원 접수를 보류하라고 비서에게 요청했다.     



다음 날 오전, 내 요청으로 세리씨는 사무실을 방문했다.     


“변호사님, 말씀하신 착수금은 이번 주말까지 준비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먼저 접수부터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네.. 그런데 세리씨..저.. 어제 최현우씨가 왔다 갔습니다. 그 포럼 운영자인 덕현씨랑.”


세리씨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뭔가 서로 오해가 있는 것.. 아니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리씨는 갑자기 날카로운 톤으로 말했다.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뭐 이상한 짓이라도 했다는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요. 음.. 세리씨가 혹시 현우씨 회사에 가서 자료를 갖고 온 적이 있나요?”

“예. 있어요. 그런데 그건 제 자료에요. 제가 부탁했던 자료고 그래서 제가 받아온 거예요.”     

내 안에서 기둥하나가 부러지는 느낌이었다.


“세리씨. 제게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세리씨는 한참을 날 노려보았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뒤 세리씨는 말했다.     


“변호사님이 제 말을 안 믿으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제가 사건을 맡길 수 없습니다. 제 말을 믿지 않는 변호사와 어떻게 일을 같이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아무 말 없이 책상만 쳐다보았다.

당황스럽다기 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컸다.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제가 드렸던 자료 다 돌려주시죠. 그리고 저랑 했던 대화 내용은 딴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주세요.”     


나는 기록 봉투째로 세리씨에게 돌려주었다. 기록을 챙기고 문을 나서는 세리씨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세리씨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더 깊이 들어가서 확인해 볼 수도 있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내 손을 떠난 사건이므로.     


다만 몇 달 후 통화한 후배에게 현우씨 근황을 물어봤더니 그 뒤로는 별 다른 문제가 없고 문제의 그 여성도 포럼에서 탈퇴했다고 한다.      


일방적인 얘기만 믿고 소송을 진행하는 것이 얼마나 아찔한 일이 될 수 있을지 실감한 사건이었다.


세리씨 가슴 속의 그 도깨비 불은 이제 잦아들었을까.

이젠 폭풍속을 헤쳐나와 거울 앞에서 차분한 자기 모습을 찾았을까.     


그녀가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줄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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