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책에서 배운 지식을 장착하고 세상에 나갈 때, 내게 불어오는 바람이 때로는 순풍이요 때로는 역풍이다. 우리는 변화무쌍한 바람을 맞으며, 책 바깥에 진짜 세상이 있음을, 지식의 윗선에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전적인 지혜(?)가 있음을 배운다.,
세상 경험 부족한 백면서생(白面書生)에게
한 사람의 운명이 판가름 나는 법정은
그 자체가 엄청난 수련의 장(場)이다.
사법시험 합격 후 사법연수원 2년차이던 1993년. 교육과정상 사법연수생들은 몇 건의 국선변호를 담당해야 한다.
형사사건의 변호인이 되어 피고인을 위해 ‘진짜’ 변호를 하는 일은 병아리 법조인들에게 가슴 떨리는 도전.
혹시라도 내가 맡은 피고인이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재판을 받게 된 것이라면 무죄를 위해 싸워야 할 것이고, 죄는 지었더라도 딱한 사정이 있다면 그 점을 재판부에 피력해서 정상참작을 받도록 해야 한다.
당시 내 수습법원이었던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내게 배당을 한 첫 번째 국선변호 형사사건 피고인은 절도 전과 4범인 장 00씨(당시 35세).
오토바이는 피해자에게 이미 반환됐으므로 전과만 없었다면 검찰 단계에서 약식기소(벌금형)로 간단히 끝날 수도 있었다.
영등포 구치소에 있는 그를 접견하러 갔다.
내가 아직 사법연수생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나이가 들어 보이게 뿔테 안경을 쓰고 수염도 깎지 않았다.
법리적 지식이야 기성 변호사에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경험이 부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피고인이 내가 사법연수원생이라는 점 때문에 미덥지 못하게 생각하여 불안해 할까봐 약간의 변장(?)을 감행한 것.
나는 사건 기록을 펜으로 톡톡 치며 무게를 잡고 말했다.
“아니 어쩌다가 이런 일을 또 저지른 겁니까?”
그는 고개를 조아리며 울먹였다.
“정말 죽을 죄를 졌습니다. 변호사님. 흑흑..”
“아니, 아닙니다. 뭐 그렇게까지 심한 죄는 아니구요. 진정하시구요.”
정말 심성이 착한 사람이구나. 하지만 여러 차례 절도 전과가 있다는 것은 판사에게 나쁜 선입관을 주기에 충분하다.
“오토바이를 훔쳐서 이를 팔아넘기기로 하신 거죠?”
“네. 제가 정말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을 안 대기로 했는데, 어머님이 갑자기 암 판정을 받으셔서 병원비가 필요해서... 그랬습니다.”
앗? 어머니가 암 판정? 경찰, 검찰 수사기록에는 없던 내용이다.
이는 범행동기와 관련된 것이므로 재판부에 어필할 만한 부분이다. 나는 좀 더 자세히 말해 달라고 했다.
“네, 어머니가 두 달 전에 위암 2기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흑흑... 큰 병원에 가서 빨리 조치를 해야 한다는데 직업도 없는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주위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보려고도 했지만 잘 안됐습니다. 평생 저 때문에 마음고생만 하고 사신 어머님인데... 제가 정말 불효자입니다.”
나도 눈물이 맺혔다.
“왜 그런 내용을 경찰, 검찰에서 말하지 않았나요?”
“말해봐야 들은 척도 안합니다. 수사하는 양반들은 제가 잘못한 것만 찾으면 자기 할 일 다 한 걸로 생각하니까요.”
그래. 이 부분은 변호인인 내가 주장해야 한다.
“변호사님. 저 이번에 꼭 집행유예로 나가야 합니다. 힘 좀 써주십시오.”
“네, 저도 그렇게 하도록 노력할 겁니다. 그런데 전과가 있어서. 혹시 정상참작 사유로 주장할 만한 것들이 좀 더 있나요?”
“혹시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씀드려볼게요.”
어려운 환경에서도 야간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그는 방학 때 막노동 일을 하다 추락해서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 일을 비관하면서 나쁜 길로 빠져들어 전과를 쌓아가기 시작했던 것.
하지만 착한 여성을 만나 결혼하고 그는 다시 마음을 바로 잡았다. 종교도 갖게 됐다. 열심히 교회 나가면서 바른 삶을 살고자 했다.
그 와중에 선배 정비소에 취직이 되어 안정적인 삶을 시작했는데, 선배 부탁으로 보증을 섰다가 선배가 도망가는 바람에 그나마 있던 집은 경매에 넘어가고 그 와중에 부인과 싸우다가 부인을 여러 차례 폭행해서 부인은 가출해 버렸다.
한 인간의 삶이 거센 운명의 파도에 이렇게 스러져 가는구나...
“변호사님, 저 이번에 실형(實刑) 선고 받으면 어머니는 그냥 저렇게 돌아가시고 말 겁니다. 어린 두 애들도 돌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도록 힘 써 주세요.”
“부인에게 연락이 안 되나요? 애들을 누군가 봐줘야 할 거잖아요? 제가 연락해 볼게요.”
“소용없습니다. 저란 놈이 지긋지긋해서 도망간 사람입니다. 재혼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흑흑...”
접견을 마치고 구치소로 다시 돌아가는 절뚝거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나는 수사기록을 뒤져 피해자에게 연락을 했다. 피해자가 범인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처벌불원서’를 작성해 주면 재판에 유리하다.
피해자는 내 전화를 받고는 자기가 왜 그걸 써줘야 하냐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연히 그럴 만했다. 나는 한번만 만나달라고 간청했다.
다음 날 피해자 직장으로 찾아갔다. 나는 장씨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조금 더 과장해서 그의 딱한 사정을 피해자에게 이야기했다.
“선생님,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 지금 너무 딱합니다. 저 국선변호사입니다. 무료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이렇게 부탁을 드립니다. 여기에 서명을 좀 해주시죠.”
피해자도 내 얘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부디 잘 되길 바란다며 내가 내민 처벌불원서에 서명해주었다. 오케이!
어차피 무죄를 주장할 수는 없었기에 장씨가 처한 상황을 최대한 부각시키기로 했다. 내가 강조하려는 포인트는 다음 6가지
1) 범행 동기 :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함
2) 피해변제 : 오토바이는 피해자에게 반환되어 실제 피해는 없음.
3) 피해자는 피고인을 용서하고 처벌을 원치 않고 있음.
4) 피고인은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상황
5) 부인이 가출을 해서 자식들을 혼자서 키우고 있는 상황
6) 어머니가 위암 판정을 받았는데 피고인이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함.
나는 이 내용을 ‘변론요지서’에 자세히 기재했다.
법정에서 최종변론을 할 때, 판사님이 눈치를 주었지만 10분간이나 장씨의 사정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이런 약자들을 어떻게든 보살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어필했다.
피고인을 바라보는 판사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심 불안했다.
드디어 선고일.
보통 형사사건 선고일에는 변호인이 출석하지는 않지만 나는 판결 선고 30분 전에 초조한 마음으로 법정에 도착했다. 판사님이 입장했다.
판사님은 사건 번호를 호명하더니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
“피고인! 피고인은 전과도 많고 이번 사건 죄질(罪質)도 아주 안 좋아요. 하지만 피해자가 처벌불원서를 제출했고 피고인 사정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어 보이니 이번에 한해 집행유예를 선고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저지르지 마시고 성실히 사세요. 국선변호인도 수고많았습니다.
피고인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하되 그 형의 집행을 2년간 유예한다.”
와우! 진심이 통했다.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으므로 바로 석방이 가능하다. 장씨는 나를 돌아다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영등포 구치소에 전화를 걸어 장씨의 석방 시간을 물어봤다.
오후 5시. 내가 영등포구치소에 도착해서 총무과에 들러 석방 절차를 밟고 있는 장씨를 찾았다.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는 장씨.
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손을 뻗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장씨의 손을 잡고 구치소 밖으로 나왔다. 아, 이게 바로 변호사의 역할인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는데, 어떤 여성이 우리 앞에 섰다.
“상구 아버지, 고생 많았어요.”
어? 부인?
이런 감동적일 데가. 가출한 부인이 돌아왔나 보다.
“혹시 이 분이 그 가출했던 부인이신가요?”라고 장씨에게 물었다.
장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죄송합니다. 집사람 가출 안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뭐?
그러고 보니 장씨는 더 이상 절뚝거리지도 않았다.
“어, 다리는?”
“아, 구속된 후 구치소에서 좀 삐끗했는데, 마침 다리를 절고 있어서 그때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다행히 이젠 괜찮아졌습니다. 그 부분도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이런 뻔뻔한 인간이...!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하지만 ‘제발 그것만은’이라는 심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어머님... 위암... 선고는?”
“그것도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꽤 됩니다.”
그는 나를 보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럴려고 했던 건 아닌데요. 경험 있는 변호사가 왔으면 제 얘기를 안 믿어줬을 겁니다. 그런데 딱 보니 사법연수생이더라구요. 어차피 정상참작 사유는 판사의 재량이니 국선변호인만 절 믿어주고 잘 변호해주면 승산이 있겠다 싶어 조금 지어낸 겁니다. 사실 피해물품도 돌려줬고 특별히 피해본 사람도 없잖아요.”
이런, 내가 사법연수생이란 걸 알아차렸다니...
“원래 딱한 사정이 있어야 판사들은 봐주거든요. 원래 이 바닥이 그래요. 보니까 제 말을 참 잘 들어주시고, 법정에서 말씀도 아주 잘하시던데, 아마 앞으로 훌륭한 법조인이 되실 겁니다.”
장씨는 부인과 나란히 정중히 인사하고 총총히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