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사람마다 지문(指紋)이 다르다. 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각 개인마다의 독자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렇듯 지문이 서로 다를진대, 사람의 생각이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뻔하지 뭐, 그 속을 내가 모를 줄 알고?”라며 쉽게 넘겨집는다. 갈등의 상당 부분이 이러한 오해와 속단 때문에 발생한다.
상대방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진지한 탐색을 해보지 않으면 그에 대한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 질문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았는데 답변이 제대로 될 리가 있겠는가.
변호사 5년차, 그러니까 지금부터 15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로펌의 배려로 나는 모 대학원 최고 경영자 과정에 입교했다. 다양한 경영자들을 만나는 것이 우리 로펌을 알리고 새로운 의뢰인을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2주일에 한 번씩 강의를 듣고 별도로 회합도 갖는 식으로 진행됐다.
강의 시작 전에 진행된 저녁식사 자리. 우리 테이블에는 나를 포함해서 5명. 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회사 CEO들.
그 중 중소 IT기업 박 사장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박 사장 회사의 최 과장.
성실한 프로그래머로서 실력도 출중해서 박 사장이 흡족하게 생각하는 직원이다. 올해 연봉이 3,500만 원이었는데, 박 사장은 내년에 10% 정도 인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박 사장 회사는 팀제가 아니라 프로그래머 개개인이 프로젝트를 독자적으로 맡아서 수행하고 있었기에 굳이 연공서열을 따지지 않고 성과에 따라 사장이 재량을 갖고 연봉을 책정하더라도 내부적으로 분란의 소지가 크지 않은 독특한 구조다.
1차 협상자리에서 최 과장이 요구한 것은 전년 연봉 대비 30% 인상이었다.
지금까지 몇 년간 연봉협상때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던 그였기에 박 사장은 의외라 생각했다. 최 과장이 물론 일을 잘 하지만 30% 연봉인상은 조직관리 차원에서도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봐야 서로 감정만 상할 것 같아 일단 며칠 뒤에 다시 얘기하기로 했단다.
“그 친구 요구대로 해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최 과장은 우리 회사에서 곡 필요한 인재거든요. 협상을 잘 해야 할 텐데. 여러 선배님들,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좋은가요?”
윤 사장이 말했다.
“박 사장은 10% 인상을 생각하고, 최 과장은 30% 인상을 요구하니 결국 중간점인 20% 정도에서 만나야 하지 않을까?”
박 사장은 난색을 표명했다.
“20%도 무리입니다. 돈 가지고 이 친구랑 밀고 당기는 일이 벌어질 줄 몰랐네요.”
“연봉협상이 다 그렇지 뭐. 결국 다 돈이야 돈. CEO는 그 문제가 가장 어려운 거라구.”
우리 테이블에서 가장 연장자인 황 사장님이 박 사장에게 물었다.
“네? 뭐... 이유야 뻔하지 않을까요? 회사에 기여한 바 있으니 대우를 해 달라는 거겠죠.”
“구체적으로 왜 연봉을 더 올려달라는지 안 물어봤죠?”
“직원이 돈 더 달라는 이유는 뻔한 것 같아 물어볼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괜히 서로 더 어색해질 것도 같구요.”
“박 사장. 최 과장은 원래 연봉에 대해 그렇게 까탈스럽지 않았다고 했지요? 그런데 이번에 30%나 인상을 요구하는 걸 봐서는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요? 경쟁사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았거나, 아니면 집에 갑자기 돈이 필요하거니, 그것도 아니면 자기 친구가 비슷한 일을 하는데 이번에 연봉 수준을 비교해보고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더 달라고 할 수도 있고.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황 사장이 그렇게 설명하자 박 사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10%니 30%니 숫자가지고만 밀고 당기면 협상이 팍팍해집니다. 그러지 말고, 왜 연봉인상을 요구하는지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에서 물어봐요.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의외의 얘기를 들을 수도 있어요. 그 친구를 꼭 잡고 싶으면 그렇게 해봐요.”
박 사장은 그렇게 해보겠다고 했다.
며칠 뒤 박 사장이 내게 전화를 해왔다. 법적으로 한 가지 질문사항이 있단다.
박 사장은 최 과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먼저 설명해 주었다.
박 사장은 최 과장과 두 번째 만난 협상자리에서 분위기를 최대한 부드럽게 끌고 갔다. 그 동안 최 과장이 얼마나 회사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으며 그 점을 박 사장은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최 과장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최 과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사연을 말했다.
최 과장은 초등학교 4학년 딸아이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왕따 당하고 있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던 것. 최 과장 부부는 딸이 그동안 힘들었음에도 그 내막을 몰랐다는 것 때문에 자책을 했다. 담임선생님과 의논해 본 결과 왕따를 주도한 친구들이 여러 명이라 선생님이 주의를 줘도 왕따 문제는 재발할 가능성이 커서 아무래도 전학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최 과장 부부도 아이를 계속 이 학교에 보내기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전학가기 위해서는 집을 이사해야 하는데 옮겨야 할 집의 전세금은 지금보다 2000만 가량 더 들었다.
대출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래 저래 돈이 많이 들어갈 상황이라 최 과장은 기존 연봉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만약 연봉인상이 충분치 않으면 전직(轉職)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박 사장은 최 과장을 위로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최 과장은 대출을 통해 전세자금을 마련한다고 하는데, 회사 주거래 은행을 통하면 훨씬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경리팀을 통해 알아보니 회사가 연대보증을 선다면 최저 금리로 대출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다만 회사가 아무 이유 없이 최 과장의 대출채무에 대해 연대보증을 서 준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내게 문의한 것이다.
나는 회사와 최 과장간에 계약서를 써서 ① 회사가 최 과장의 은행대출금에 대해 연대보증을 한다 ② 단, 최 과장은 이에 대한 담보로 나중에 대출금을 갚지 못할 경우, 또는 이자를 납입하지 못할 경우 자신의 임금이나 퇴직금과 대출 연체금을 상계처리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키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최 과장에게 당장 필요한 돈이 전세금 차액 등을 포함해서 2,500만 원 정도인데 사실 30% 연봉 인상으로 1년에 1,000만 원 더 받는다고 해서 당장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연봉 더 주는 회사를 당장 찾기도 쉽지 않고. 더구나 우리 회사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아놓았는데 그것을 날려버리는 것에 대해 본인도 부담스러워 하더라구요. 그래서 대출을 알선해 주는 쪽으로 얘기했더니 본인도 반가워하더군요.”
나도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최 과장이 얼마나 마음이 힘들까 공감이 되었다.
마침 내 의뢰인 중에 학생심리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분이 있다는 생각이들어 그 분과 통화해 봤더니 바로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맞춤 클리닉 상품이 있다고 했다. 부모와 아이가 같이 와서 상담을 받는 방식으로 한번에 15만원씩 총 45만 원인데, 내가 소개한 것이라 30만 원만 받겠다고 했다.
나는 박 사장에게 클리닉에 대해 설명했더니 박 사장이 고맙다며 개인적으로 돈을 지불할테니 소개해 달라고 했다.
박 사장은 최 과장에게 클리닉을 알려줬다. 최 과장은 그런 클리닉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면서 박 사장이 시키는대로 부부가 같이 딸 아이를 데리고 그 곳을 방문했다. 최 과장 부부는 클리닉을 다니면서 딸아이의 고민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딸 아이가 어떤 꿈을 갖고 있는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왕따의 경험은 아픈 일이었지만 그로 인해 가족 간에 서로를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됐던 것.
2주 후 최고경영자 과정 모임에서 박 사장은 후일담을 얘기해줬다.
윤 사장은 “그래서 결과적으로 연봉인상은 어느 정도 해줬남?”이라며 궁금해했다.
박 사장은 씩 웃었다. “서로 만족할 만한 선에서 웃으며 해결했습니다. 아주 흡족하게요. 좋은 조언을 해 주신 황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일은 내게도 큰 가르침을 주었다.
변호사들은 의뢰인과 상담을 하면서 사건 자체에 집중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건에 내몰린 것은 개별적인 한 명 한 명의 사람이다. 그들은 저마다의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일률적인 솔루션을 줄 수는 없다. 그들의 성향과 상황에 맞는 솔루션을 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물어봐야 한다. 지금 마음의 상태는 어떠하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를...
의뢰인의 말에 경청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열쇠가 된다는 것을 일깨워 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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