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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Jan 13. 2016

앗, 보증을 서라구요? 제가요?

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 출처 : “이제는 이기는 인생을 살고 싶다” Episode 15.(p178)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809067


변호사라는 직업이 주는 장점, 내가 배운 법적 지식을 활용해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점이다. 법적 분쟁에 휘말린 사람에게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 줄 때의 그 짜릿함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기 힘들다. 

그런데 때로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며칠 전에 통화를 한 후배 성철.


내가 왜, 무슨 이유로 그 당시 그렇게 마음을 던졌을까. 상황에 내몰린 탓도 있지 않았을까.

어떻든 나 스스로를 칭찬하게 만드는 소중한 기억 하나가 있다.      




5년 전 일.


사소한 형사문제에 휘말려서 나를 찾아 온 성철. 사회에서 알게 된 후배인데 중견기업 자금부에서 일하고 있다.     


“그냥 합의하는 게 어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하지만 성철은 단호했다.


“선배님.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순간적으로 발생할 일인데 제가 가해자인 것처럼 합의를 해야만 하는 건가요? 그건 사회정의에 반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사회정의. 이러면 좀 골치 아파진다. 원칙주의자인 성철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자네 마음은 알겠는데. 일단 상대방이 상처를 입었다고 진단서를 제출한 상황이라 자네에겐 불리하거든.”

“선배님. 전후 맥락을 따져보면 오히려 저쪽이 가해자 아닌가요?”     




아파트 5층에 사는 성철에게는 5살과 3살 된 두 아들이 있다. 

어느 일요일 저녁, 성철 부부는 애들만 남겨두고 잠시 시장에 다녀왔다. 집으로 들어서는데 대문이 열려있고, 4층에 사는 김형래씨(45세; 가명)가 성철네 집에 들어와 있었다. 


성철의 두 아들은 손을 들고 무릎을 꿇은 채 벌을 서고 있는 게 아닌가.     

평소 4층에 사는 이가 정신적으로 문제 있다고 해서 아파트 주민들끼리 말이 많았는데 바로 그가 자기 집 안에 있는 걸 봤으니 성철은 가슴이 철렁했다. 성철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자 그는 “초인종 눌러서 애들이 문 열어줬어요. 물 한잔 달라고 했는데 애들이 안 줘서 혼냈어요.”라며 횡설수설했다.      


화가 난 성철은 “어른도 없는 집에 왜 함부로 들어와요?”라고 거세게 항의하자 김형래씨는 “너도 나를 무시하냐?”면서 주먹으로 성철을 때리려고 했다. 성철은 주먹을 피하려 몸을 숙이며 그를 밀쳤고, 그는 밀려 넘어지며 머리를 바닥에 부딪혔다.      


김형래씨는 병원에서 전치 3주의 뇌진탕 진단이 나왔다. 그는 성철을 상해죄로 고소했다. 그러자 성철도 김형래씨를 주거침입죄로 맞고소 한 것.     




경찰이 보더라도 김형래씨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던지 성철에게 서로 원만히 합의하고, 쌍방 고소를 취하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을 것을 권유했단다. 나 역시 서로 합의하고 고소취하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독실한 크리스찬이자 원칙주의자인 성철은 그런 식의 타협은 옳지 않아 보인다며 합의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성철아. 네 마음 알겠는데, 살다보면 그냥 피해가는 게 좋은 때도 있어. 꼭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성철을 달래보려 했지만 성철은 김형래씨와 적당히 합의하는 것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성철은 상해죄로 벌금 70만 원, 김형래씨는 주거침입죄로 벌금 50만 원의 형(약식명령)을 받고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그로부터 1년쯤 지난 어느 날 나는 성철의 전화를 받았다. 다급한 그의 목소리.     


“선배님. 저 어떻게 하면 좋죠? 눈앞이 캄캄합니다.”     


성철이 다니던 회사가 대표이사의 무리한 투자결정으로 인해 자금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6개월 전에 부도처리 되었단다. 성철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후 직장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끝에 헤드헌팅 회사를 통해 독일계  Z사 자금부 담당 직원을 뽑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입사지원을 했다.     


경쟁률이 치열했지만 성철은 서류심사를 통과하고 면접도 잘 마쳤다. Z사 연봉은 예전 회사에 비해 많이 높은 편이었고, 성철의 장기인 외국어 실력을 뽐낼 수 있는 곳이라 여러 면에서 성철에게는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제일 마지막 신원조회 단계.     


회사는 성철에게 몇 가지 확인절차를 거쳤는데, 그 중 ‘형사적으로 처벌받은 사실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항목이 있었다. 일반 사기업으로서는 형사처벌 받았는지 여부를 파악하기 어렵다. 성철은 거짓으로 대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른생활 사나이’ 성철은 자신이 상해죄로 70만 원 벌금형을 받은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성철은 비록 자신이 벌금형을 받았지만 전후 사정을 잘 설명하면 충분히 인사담당자를 납득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단다.      


막상 성철로부터 벌금 전과 사실을 통보받은 인사담당이사는 성철을 불러서 ‘우리 회사는 폭행, 상해 전과자를 취업시킬 수는 없다.’고 통보했다는 것.      




“그때 선배님 말씀대로 합의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후회막급입니다. 회사 측에 설명을 해서 취업이 되도록 할 방법은 정말 없을까요? 면접까지 다 통과한 마당에 이렇게 되니 참 억울합니다.”     


가장(家長)이 되어 6개월 째 월급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도대체 이 난관을 어떻게 뚫어보나...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나는 직접 Z사와 부딪혀 보기로 했다.


성철에게 Z사 인사담당이사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성철은 내가 나서주자 큰 기대를 하는 눈치로 네게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다.     


심호흡을 하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저, 안 이사님 되시죠? 안녕하십니까. 저는 조우성 변호사라고 합니다. 네. 이성철씨 문제와 관련해서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안 이사는 차분하게 전화를 받았다. 나는 성철이 억울하게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사실 그 내용은 별 것 아니라는 점을 한참 설명했다. 내 설명을 가만히 듣고 난 안 이사가 질문했다.     


“실례지만 조 변호사께선 이성철씨와 어떤 사이인가요? 변호사와 의뢰인 관계인가요?”     


“음... 아... 변호사와 의뢰인 관계라기보다는 사회에서 알게 된 선후배사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합니다. 그때 그 사건도 제가 정식으로 의뢰받아 처리한 건은 아니고 지인으로서 상담을 해 준 겁니다.”     


나는 솔직히 설명했다.     


“그럼 그 의견은 공식적인 의견이 아니지 않나요? 정식 변호사로서 사건을 수임했다면 모르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친분으로 사건을 도와준 것에 불과하다면, 조 변호사님의 이성철씨에 대한 평가는 다소 편향적이라고 보이는데요?”     


앗, 내가 말을 잘못한 건가...     


안 이사는 말을 이었다.


“어떻든 자세하게 설명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회사 방침이 그렇다보니 이성철씨 건에 대해선 부정적 답변을 드릴 수밖에 없군요, 유감입니다.”

  

외국계 회사라서 그런지 형사 전과에 대해서 아주 엄격한 것 같았다. 기대를 갖고 옆에서 지켜보던 성철은 크게 낙담을 했다. 다시 일자리 알아보려면 최소한 몇 개월은 더 걸려야 할 텐데.     


내가 답변을 잘못해서 더 꼬인 것 같아 자책이 되었다. 젠장... 오기도 생겼다. 성철이 건네 준 안 이사 명함에 있던 이메일 주소를 따로 메모했다.      


좋다. 어차피 밑져봐야 본전. 잃을 게 없다는 심정으로 그날 밤 안 이사에게 메일을 썼다.     





“안 이사님. 아까 전화로 인사드린 조우성 변호사입니다. 

갑자기 연락드렸음에도 친절하게 전화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성철군은 제가 아끼는 후배이기에 한번만 더 부탁을 드리고자 메일을 씁니다. 


번거롭게 해 드리는 것 같아 송구하지만 넓은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제가 사회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성철군은 참 특별한 사람입니다. 요즘 젊은이들답지 않게 고지식하면서도 원칙을 지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형사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건 내용을 요약하자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아래층 사람이 성철 부부가 집에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올라와 5살, 3살 아이들을 위협하는 것을 발견한 성철군이 항의하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따지고 보면 성철군을 가해자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사절차상, 원인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이 피해자로 인정받는 다소 불합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아래층 사람이 성철군에게 밀려서 다치게 되자 진단서를 발급받아 고소했기 때문에 문제가 커진 것입니다. 


형사 문제화되자 경찰은 서로 합의보고 종결하라고 권유했고, 저 역시 그렇게 하라고 성철군에게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성철군은 그렇게 하는 게 자기 양심에 반힌디면서  결국 벌금형을 받은 겁니다.      

저는 성철군이 참 융통성 없다고 생각합니다. 웬만한 사람이면 피해자와 적절히 타협해서 전과자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성철군은 옳고 그름에 대한 주관이 뚜렷했기에 비록 자신이 벌금 전과자가 되더라도 부당한 타협은 하지 않은 겁니다.      


이사님.     


현재 성철군이 귀사에 지원한 파트가 자금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금부 담당 직원은 원칙과 규율을 지키며 쉽게 타협하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5년간 지켜본 성철군은 그 직에 꼭 맞는 자격과 성품을 갖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성철군과 별다른 이해관계 없습니다. 성철군이 취업한다고 해서 제가 커미션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제 친인척도 아닙니다. 


하지만 성철군 사회 선배로서, 성철군 앞에 찾아 온 좋은 기회가 날아가 버릴 것을 두려워해서 이렇게 메일을 쓴 것입니다.     


형사 사건과 관련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언제든지 제게 문의해 주시면 설명 드리겠습니다. 제 휴대폰 번호는 010-5472-xxxx입니다.


긴 메일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성철군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조 우 성 올림“     



휴... 일필휘지(一筆揮之). 정말 순식간에 써내려갔다.

그리고는 발송 버튼을 눌렀다.     




다음날, 안 이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 번 만나자고 했다. 그 날 오후 Z사에 가서 안 이사를 만났다. 


이번에 안 이사는 성철군의 형사사건 내용을 다시 물었고 나는 이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내 설명을 꼼꼼히 메모하면서 듣고 있던 안 이사는 내게 불쑥 이런 제안을 했다.     




“조 변호사님, 그럼 만약 이성철씨가 우리 회사에 입사해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예를 들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누군가를 폭행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에 대해서 일체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나 보증서 같은 거 한 장 써주실 수 있나요?”     


‘신원보증서’ 같은 걸 말하나? 

근데 내게 그걸 요구한다고?

나는 좀 너무한다 싶었다.     


‘보증’이라니. 와이프가 알면 난리도 아닐 것이다.

보증 때문에 다양한 법적 분쟁에 휘말린 의뢰인들을 숱하게 본 나인데, 사회에서 만난 후배를 위해 보증을 서야 한다?

고민되었다.     


“아무래도 부담스러우시죠?”

안 이사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여기까지 왔는데 밀리는 것은 정말이지 사나이로서 모양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짧은 망설임이 있었지만 그대로 달려온 관성을 이길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설마 무슨 일이야 생길라구. 성철이는 믿을 만한 친구다.     


“네, 주십시오. 쓰겠습니다.”


안 이사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안 이사는 메모지를 챙기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내게 됐다는 손짓을 했다.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됐습니다.”


응, 뭐지? 테스트?     



3일 후 성철은 Z사로부터 최종 합격통보를 받았다. 


뒤에 성철로부터 들어보니 별 이해관계 없는 변호사가 나서서 메일도 보내고 직접 회사까지 찾아와 성철군을 옹호해 준 점을 인사담당이사가 본사에 보고했고, 본사에서도 ‘그 정도면 적어도 문제를 일으킬 사람은 아니다’라는 내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눈물을 글썽이는 성철과 나는 진한 포옹을 했다.     


얼마 전, 요즘 모든 회사가 다 어렵다고 하는데, 이 친구네 회사는 어떤가 싶어 전화를 해봤다. 


성철이 입사할 당시 Z사는 국내 업종 5위였는데, 이젠 2위라고 했다.
성철은 그 회사 회계팀장이 되어 있었고.     

“선배님. 제가 웬만하면 선배님 법률사무소로 사건을 밀어보려 해도 외국회사라 본사에서는 꼭 김앤장하고만 진행하라고 합니다. 에구,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괜찮네, 이 친구야. 사건 안 밀어줘도 되네. 요즘 같은 시절에 그리 잘 나가고 있다니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     


이런 보람 하나 마음 속에 갖고 사는 것, 
썩 괜찮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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