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나비의 날개 짓처럼 작은 변화가 폭풍우와 같은 커다란 변화를 유발시키는 현상을 말하는 기상학 용어였지만, 요즘은 어떤 행위가 당초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널리 쓰이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인생살이가 그런 것 아닐까? 계획한 대로 결과가 나오는 경우보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은...
나쁜 나비효과도 있고 좋은 나비효과도 있으리라.
기억에 남아 있는 나비효과의 훌륭한 사례 하나를 떠올려본다.
“조 변호사, 설 대목 전이라 많이 바쁘지? 한 30분만 시간 내 줄래? 긴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 말야.”
대협이었다. 이번엔 또 어떤 창의적인 일을 갖고 오려나?
이 친구와의 인연을 떠올려본다.
변호사 생활 시작한 지 3년쯤 되었을 때 누군가 소개로 그를 만났다. 홍콩에서 조그맣게 시작한 IT업체가 미국 펀드에 인수되면서 꽤 큰 돈을 번 그는 홍콩과 한국을 오가며 다양한 거래를 성사시켰다. 나랑 동갑. 인물도 좋고, 성격도 좋은 호남형의 성공적인 청년 사업가.
미모의 전문직 여성과 결혼해서 정말 남부럽지 않은 인생행로를 가고 있던 그였다.
나는 대협의 의뢰가 있을 때마다 계약서 검토 및 거래협상과 관련된 조언을 해주었다.
행복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주어지자 하늘이 시샘해서였을까.
한 번의 과감한 투자가 실패로 끝나면서 그는 그동안 모았던 재산을 날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빚더미 위에 올라앉게 되었다.
‘사업, 그거 무서운 거야’라는 어른들 말씀이 실감났다. 칭송받던 젊은 사업가에서 졸지에 실패한 거품 벤처인이 되어버린 그.
큰물에서 놀던 친구라 그런지 그 상황에서도 기는 죽지 않았다.
빚 갚으라는 채권자에게 “내가 잘 돼야 사장님 빚도 갚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닦달하지 말고 힘을 주셔야죠. 힘을!”이라며 너스레를 떨곤 했다. 하지만 나를 만나서는 솔직한 속내를 털어았다.
“와이프가 고생이지 뭐. 와이프 명의로 신용카드 7개 만들었는데, 그 중 내가 6개 쓰면서 돌려막기 하고 있어. 아, 천하의 박대협이 이게 무슨 꼴이람. 한 방만 제대로 터지면 되는데...”
대협은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한번 창공을 날아본 사람은 진흙탕에서도 시선은 창공을 향한다는 말이 있다. 대협이 꼭 그랬다. 내 바램 같아서는 작은 일부터 성공시켜서 차근 차근 재기의 발판을 다져가면 좋으련만 100억 대 미만 딜(Deal)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판 뒤집기를 원했다. 그러다보니 내게 상담을 의뢰하는 프로젝트들은 하나 같이 황당하거나 위험성이 큰 것들이었다.
대협이 그런 식으로 헛발질을 한 지도 어언 2년이 접어 들어가는 시점. 그 큰 빚을 안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가늠이 안 되었다.
과연 오늘은 어떤 프로젝트를 가지고 날 찾아오는 걸까?
회의실에서 마주한 대협은 여전히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아, 니콜라이 2세, 그리고 금과 보물. 나는 표정관리에 애를 먹었다.
“그 많은 금과 보물을 비밀리에 빼돌리는 일이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꽤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지. 왕국을 언젠가는 다시 재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던 거야. 그런데 말야....”
대협은 누가 듣기라도 하는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를 손짓했다. 나는 계속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며 내 몸을 대협쪽으로 바짝 들이댔다. 대협은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지난 번 대협이 말했던 등소평 비자금 프로젝트와 오십보 백보인 것 같은데, 그 때 그 망신을 당하고서도 이 친구는 왜 이럴까. 나는 속으로 안타까웠다.
“내가 하는 말이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캐나다 업체가 몽골에서 금광을 발견했다는 보도가 신문에 나왔어. 바로 그 보물 중 일부를 찾은 거야. 우리 보물지도에 보면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한 세 지역에 표시가 돼 있어. 몽골정부로부터 채굴권 따내는 작업만 하면 게임은 끝나는 거지. 다만 초반에 이런 저런 돈이 필요하거든. 그래서 이 사업권을 근거로 투자를 유치하려고 해. 그러자니 계약서가 필요해서 자네 도움을 좀 받으려고 왔어.”
뭐? 이런 황당한 사업을 근거로 외부에서 돈을 받는다고?
투자사기로 고소당하면 어쩌려고?
본능적으로 ‘이건 아니다’라는 경고등이 내 머릿속에서 반짝였다.
나는 대협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얼른 기사 검색을 했다.
키워드는 ‘광산’ ‘투자’ ‘사기’ ‘구속’.
다행(?)스럽게도 대협이 말했던 것과 유사한 투자사기를 벌였다 구속된 사례가 여럿 검색됐다. 나는 그 기사들을 출력했다.
“대협아. 선입관을 배제하고 일단 이 기사들을 찬찬히 읽어봐.”
대협은 기사를 읽어가면서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친구야. 내가 웬만하면 네 편 들겠어. 그런데 이건 아니다 정말. 뻔히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코스인데 그걸 그냥 그대로 두는 게 어찌 친구가 할 짓이냐.”
대협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제수씨 임신 중이잖아? 그럴수록 위험한 일은 안 해야지. 내가 주제넘은 말을 한다고 화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얘기, 남들은 못할 걸? 남들은 네가 위험한 일을 하든 말든 돈 생기면 자기들은 좋은 일이지. 나눠가지면 되니까. 하지만 잘못되면 다치는 건 너잖아.”
대협은 겸연쩍게 웃었다.
“나도 위험한 건 아는데, 그래도 만에 하나 보물이 나올 수도 있잖아?”
“그 보물이 100년간 숨어 있다가
왜 하필이면 네 손에 들어가겠냐?
네가 그만큼 행운아라고 생각하냐?
그런 행운은 남들에게 양보해도 돼.”
내가 워낙 강경하게 반대하자 대협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대협은 통화하고 오겠다며 회의실을 나갔다.
나는 잠시 내 방에 돌아와 마음을 가라앉혔다. 친구 기를 꺾어놓은 것 같은 자책감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편지를 썼다. 궁서체 14포인트로 예쁘게.
유치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편지를 출력해서 봉투에 넣었다.
며칠 전 의뢰인으로부터 설 선물로 받은 상품권 5장을 눈 질끈 감고 봉투에 같이 넣었다.
엘레비이터 앞에서 대협을 배웅하는 자리에서 나는 봉투를 그에게 건넸다.
“어? 뭐냐?”
“연애편지일까봐? 설인데 제수씨에게 선물 좀 사드려. 체면 좀 세워야지. 안 그래?”
“뭐 이런 걸 주고 그러냐.”
항상 남에게 퍼주기만 하던, 그래서 받는 것에는 익숙지 않은 그.
그 후 대협으로부터 더 이상 몽골 금광 프로젝트를 들을 수는 없었다.
그 후 6-7개월 사이에 대협에겐 드라마틱한 변화가 찾아왔다. 예전에 대협에게 신세 졌던 후배가 괜찮은 M&A 프로젝트를 그에게 갖고 왔고, 대협은 본인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그 거래를 멋지게 성공시켰다. 연이어 2-3개의 M&A 거래를 이뤄내며 그 짧은 기간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대협. 역시 녀석은 도깨비다.
나는 대협의 활약상을 신문을 통해 접하며 내심 흐뭇해 했다.
그 해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저녁.
오랜만에 대협이 전화를 걸어왔다. 술에 잔뜩 취한 그. 당장 사무실 앞으로 내려오란다. 이런 막무가내...
“야, 오랜만이다! 연락 못해 미안했다.”
대협은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잠깐 같이 걷자고 했다.
“내가 진짜 너에게 고마워할 일이 있거든.
그런데 말야. 좀 폼 나게 인사를 하고 싶어서 참았다.
뭔 얘긴지 궁금하지 않냐?”
그 날 나를 만나고 난 뒤 대협은 집에 가서 내 편지와 상품권을 와이프에게 내 놓았다. 대협의 와이프는 내 편지를 보고는 한참을 말없이 있더니
“당신 친구도 이렇게 당신을 믿어주는데
내가... 가족인 내가... 미안했어요.”
라고 말하며 울었다.
대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내가 준 편지를 제 컴퓨터 옆에 떡 하니 붙여 놓았다.
그 편지는 완벽한 와이프 입막음용. 역시 그는 전략가다.
“친구야. 그 편지 아직까지 붙어 있어.
네게 미안한 건 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갈 땐 네 이름을 판다.
넌 우리 와이프에게 보증수표거든.
하하하. 고마워.”
그리고는 흰 봉투 하나를 내 주머니에 쿡 찔러 넣었다.
“친구야. 제수씨랑 애들 맛있는 거 사주고 나머지는 비자금 해라! 이게 내 방식인 거 알지? 추석 잘 쇠고!”
K가 주머니에 찔러 준 봉투에 든 현금을 세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것이 이런 건가?
K는 그 후로 몇 가지 사업을 진행하다 다시 홍콩으로 건너갔다.
예전처럼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지만 잊을 만 하면 불쑥 불쑥 전화를 걸어오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