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우성 변호사 Jan 17. 2016

대화를 몰래 녹음한 것을 증거로 썼단 말이에요

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민사소송과 관련한 가장 큰 오해가 ‘억울한 사람이 결국 승리한다’는 것이 아닐까.


대립된 이해관계를 가진 원고와 피고가 서로 치열하게 법정에서 다투는 것이 민사소송이다.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과 증거를 법원에 제출한다.

법원은 원고와 피고의 주장과 증거를 판단해 보고, 누구 말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판단해서 손을 들어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증거의 힘’.


주장에는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필요하다. 주장만 있을 뿐 증거가 없다면 그 주장은 일방적인 것에 불과해서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은 약하다. 각자의 진실이 충돌할 때 법원에서 살아남는 진실은 ‘증거가 있는 진실’이다.

소송 준비의 대부분은 증거를 확보하고 이를 법원에 제출하는 작업이다.     




손해배상 사건을 수임했다.


의뢰인은 ㈜W테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사이트를 구축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SI 회사다.      


사건의 내용은 이랬다.     

W테크는 발주처인 D실업으로부터 7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D실업에 물류관리 및 업무효율화 관리 프로그램을 구축해 주는 내용.     

W테크 입장에서는 상당히 큰 프로젝트였기에,  프로젝트 초기부터 많은 신경을 썼다.

W테크는 D실업으로부터 착수금으로 7,000만 원, 1차 중도금으로 1.5억 원, 2차 중도금으로 2.5억 원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W테크는 당초 계약에서 정해진 ‘납기’를 맞추지 못했고, 다른 세부적인 업무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D실업은 몇 차례 이행을 제대로 하라는 내용증명을 보내온 후 결국 W테크와의 계약을 해제한다고  통보했다. 아울러 이미 D실업이 착수금과 중도금으로 준 돈 4.7억 원과 추가적인 손해배상 1억 원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했다.      




이에 대한 W테크의 입장     


‘우리는 할 만큼 열심히 했다. D실업은 우리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여건을 만들어줘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따라서 D실업의 해제주장은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나머지 잔금 2.3억 원을 우리에게 지급해야 한다’.     




어떤 일(Task)을 수주하고 진행했는데 그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 자체를 해제한다는, 어찌 보면 아주 흔한 사건이다.


이런 경우 계약을 해제하려는 측(발주자인 D실업)은 상대방(W테크)의 귀책사유(잘못한 점)를 주장, 입증해야 한다. 즉 입증책임이 원고인 D실업에 있다.     


‘입증책임’은 소송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개념이다.


입증책임 있는 쪽에서 구체적인 사실을 주장, 입증해야 하며, 상대방은 이에 대한 소극적인 방어를 하면 된다. 입증책임이 있는 쪽에서 판사를 설득시킬 정도로 충분히 주장, 입증하지 못한다면 소송에서 패소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방어자인 W테크가 일단 유리한 위치에 있다. D실업이 먼저 소송을 제기했고(원고) W테크의 업무수행에 문제가 있었으며, 그 문제점은 계약을 존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 모든 부분에 대한 입증책임은 D실업에 있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입증책임이 있으니 D실업으로서는. 소송 수행하기 만만치 않을 겁니다. 우리가 진짜 상대방이 주장하는 것처럼 잘못을 했나요?”     


나는 W테크 프로젝트 매니저인 김 이사에게 물었다.      


“진짜 억울합니다. 변호사님. 저희는 그쪽이 시키는 대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려면 D실업측에서 작업지시를 제대로 내려줘야 하고 관련 자료도 제때 제공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자기네는 할 일을 제대로 하지도 않았으면서 납기를 어겼다고 우리에게 완전 뒤집어 씌우는 겁니다. 우리에게 잘못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대방도 잘못이 큽니다.”     


김 이사는 정말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      


“변호사님, 솔직히 이 프로젝트는 저희 회사에 크게 이익이 남지도 않습니다. 좋은 레퍼런스가 된다는 차원에서 진행했는데, 이렇게 소송까지 제기되니 참 난감합니다. 프로젝트를 총괄 진행했던 저로서는 대표님께도 면목없구요.”     


나는 충분히 해 볼 만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일단 상대방이 제출한 소장(訴狀)만을 놓고 보면 W테크에게 잘못이 있음에 대한 입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입증책임은 D실업 쪽에 있으니 재판 진행 과정을 지켜보며 적절히 대응하면 될 것 같습니다.”     


“변호사님, 저희들은 정말 억울합니다. 꼭 승소하게 해 주십시오.”     


민사재판은 결코 ‘주장’만으로는 승소할 수 없다.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입증자료’, 즉 ‘증거’가 있어야 한다. D실업이 아무리 ‘W테크가 일을 잘못 했어요!’라고 주장해도 이를 객관적으로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면 D실업이 결코 유리할 수 없는 사건임이 분명하다.     


나는 W테크 관련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D실업의 소장에 대한 답변서를 제출했다.     




1차 변론기일.   

  

“흠.. 결국 이 사건은 원고가 '고에게 귀책사유가 있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느냐에 달렸군요. 소장에는 주장만 있고 증거가 부족해 보이던데. 원고측 대리인. 피고의 귀책사유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지요?”     


담당 판사는 사건의 쟁점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원고측 변호사가 나를 한번 슬쩍 쳐다보더니 옅은 미소를 띄었다.     


뭐지? 왜 날 보고 웃지?     


“네, 갑 제4호증으로 녹취록을 제시합니다.”


원고 변호사는 마치 무슨 비장의 무기라도 제시하듯 증거를 제출했다.     


“녹취록이라... 누구와 누구의 대화를 녹취한 거죠?”


판사가 물었다.     


“원고회사 프로젝트 매니저인 박 00부장과 피고회사 프로젝트 매니저인 김00 이사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 내용을 보시면 피고회사의 과실로 프로젝트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오, 그래요?”


판사가 녹취록을 들쳐보았다.     


잉? 저게 뭐야? 대체 저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다는 거지?     


“원고 대리인. 잘 아시겠지만 녹취록에 있는 내용을 100% 다 믿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더 추가적인 증거는 없나요?”     


원고측 변호사는 자신 있게 답했다.     


“재판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녹취록 내용을 기초로 이 사건의 실체 관계가 어떤지 밝히기 위해서 피고회사 김 00이사를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저희 직원을 증인으로 신청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상대방 회사 직원을 증인으로 불러 물어 보는 것이 더 객관적이지 않겠습니까?”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럼, 피고 대리인? 어차피 증인이 피고회사 직원이니까 다음 재판기일에 출석시키는 데는 별 문제 없겠지요? 한 번 불러서 물어 보죠, 다음 기일은 11월 12일 오후 4시, 이 법정에서 그대로 속행합니다.”     





나는 머리가 띵했다.     


의뢰인 회사 프로젝트 매니저의 대화 내용이 담긴 녹취록이 증거로 나오다니. 분명 김 이사는 자신의 대화가 녹음되고 있다는 걸 몰랐을 텐데. 나는 녹취록을 들춰보기가 겁났다.


사무실에 돌아온 뒤 김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방 출장 때문에 오늘 재판에 참석하지 못한 김 이사. 재판 과정을 설명해 주고 녹취록의 내용을 대강 설명해 주었다. 김 이사는 분을 참지 못했다.



“박 부장 그 자식이...”     


나는 어떤 경로를 통해 대화가 녹음이 되었던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게 아마 그때였을 겁니다.”     


몇 달 전 김 이사는 박 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김 이사님. 제가 어려운 일만 맡겨드리고 연락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박 부장님이시군요. 저희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요 뭘. 오히려 제가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려 죄송합니다.”     


“김 이사님. 제가 이번 주에 W테크 근처에 갈 일이 있는데 시간 되시면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네요. 어디 조용한 일식집 방으로 예약 좀 해 주시겠습니까?”


발주처 프로젝트 매니저의 식사 요청이라 김 이사는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식사 자리네 나갔다.      


식사를 시작하기 앞서 박 부장은 김 이사에게 고향, 나이, 가족관계 등을 물어 보았다. 알고 봤더니 두 사람은 나이가 같았고, 큰 아들도 서로 동갑이었다.      


“오늘은 골치 아픈 일 이야기 보다는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좀 나눠보시죠. 회사 안에서만 생활하다보니 너무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 같아요. 이사님에게 넓은 세상 이야기도 좀 듣고 싶구요.”     


김 이사는 박 부장의 넉넉한 인품에 끌렸다. 50 고개를 앞두고 있는 두 사람은 그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격의 없이 나누었다. 그 날따라 술도 술술 넘어갔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다.     


박 부장이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냈다.


이하는 녹취록 기재 내용에서 인용한 것이다.     




박 : “요즘 우리 직원들 얘기를 듣다보니 김 이사님이 아주 골치 아프시겠더군요.”

김 : “네, 무슨 말씀?”     


박 : “프로젝트 참여한 인원들이 자꾸 교체된다면서요? 요즘 젊은 친구들 말도 잘 안 듣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도 없죠? 우리들 일할 때랑은 정말 다르죠?”

김 : “아... 참.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요즘 개발자들 구하기가 참 어렵네요. 실력 있는 개발자들은 자꾸 프리랜서 스타일로 일을 하려하고. 쓸 만한 친구들은 더 좋은 조건 맞춰주는 곳으로 떠나가고...”     


박 : “100% 이해합니다. 도대체 누가 상사인지 누가 부하인지 모를 때가 많아요. 그럼 어떻게 후속 개발자를 채용하십니까?”

김 : “잡코리아에 채용공고도 내고 여기 저기 알아보곤 있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프로젝트가 자꾸 지연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박 :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이사님 마음고생 심하겠습니다.”     


녹취록에서 특히 문제가 될 만한 내용으로는 ① W테크에서 개발인력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당초 약속했던 급(level)의 개발자가 자꾸 이탈한다는 점, ② 인력이 자꾸 교체되다보니 지속적인 업무감독이 되지 않아 납기가 지연되었던 점, ③ D실업 실무자들이 여러 차례 지적을 했지만 W테크에서 성실히 응하지 못했던 점 등이었다.     



“변호사님! 이건 도청(盜聽)이잖아요? 불법 아닙니까?

이런 걸 마구 증거로 제출해도 되는 건가요?”     


김 이사는 흥분해서 내게 물었다. 나는 김 이사를 진정시키고는 설명해주었다.     


“그게... 우리 법이 좀 애매하게 되어 있습니다. 갑과 을이 대화하는 것을 제3자인 병이 몰래 녹음하면 통신비밀보호법상 위법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대화자인 갑이나 을이 상대방 몰래 녹음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이를 처벌하는 법조항이 없어요. 잘하는 짓이라고 장려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위법한 행위는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재판을 할 때 상대방과 대화를 몰래 녹음한 다음 녹취록 형태로 제출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답니다.”     




“아... 그 자식이 그걸 악용한 거군요. 그럼 어떻게 하죠?”


“다음 기일에 이사님을 증인으로 신청했는데...”

“좋아요. 제가 증인으로 나가서 아니라고 말하죠! 제가 나가서 말하겠습니다.”

“아.. 네.. 그런데 그것도 잘 생각해 보셔야 할 일입니다만..”


나는 내심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예상대로 녹취록 내용을 보고 W테크 대표이사는 노발대발했다. 김 이사에게 다음 재판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해서 반드시 녹취록의 내용을 뒤집으라고 했다는 것.     


일주일쯤 지난 뒤 김 이사가 나를 찾아왔다.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어제 D실업 박 부장이 전화를 걸어 왔다는 것. 김 이사가 전해 준 두 사람의 통화내용은 이랬다.     


박 : 아이구, 안녕하세요, 김 이사님. 접니다.

김 : 어...? 당신! 당신 또 지금 녹음하고 있나?      


박 : 아닙니다. 녹음이라뇨. 그런 거 안합니다.

김 : 당신이 도청한 거 다 알고 있어. 그런 식으로 사람 뒤통수를 치나? 두고 보라구. 내가 재판에 증인으로 나가서 모든 걸 사실대로 밝힐거야.     


박 : 아, 그래서 제가 전화 드렸습니다. 김 이사님 그 날 증인으로 나오시면 ‘선서’를 하게 되는데요, 선서하고 거짓말 하시면 위증죄가 된다고 하더군요, 위증죄라는게 징역 1-2년을 살 수도 있는 무거운 죄라고 저희 리 변호사가 그러던데요?

김 : 뭐요? 징역?     


박 : 회사가 평생 이사님 책임져 줄 것도 아닌데 너무 위험한 일을 벌이시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더구나 그 날 저랑 편안한 상태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 녹취록으로 나와 있는데, 그것과 상반되는 말을 하시면 누가 보더라도 위증으로 볼 텐데...

김 : 당신! 당신 지금 나한테 병 주고 약 주는 거요?     


박 : 아니, 그게 아니라... 아실 건 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김 이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변호사님, 박 부장 말이 사실인가요? 위증죄로 걸릴 위험이 큰가요?”


바로 내가 우려하는 바였다. 박 부장, 이사람. 상당히 교활하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녹취록이 이미 나와 있는 상황에서 법정에서 선서하고 이를 뒤집는 증언을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상대방 변호사가 녹취록 내용을 들이 밀면서 “당신 이러면 위증죄로 처벌될 수 있어요!”라고 강하게 몰아붙일 것이 뻔하기 때문.     


김 이사는 그 후 며칠을 고민하다가 증인으로 출석하지 못하겠다고 회사에 밝혔다. W테크 대표이사는 김 이사의 설명을 듣고는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도 이사라는 작자가 이런 식으로 대응한다고 대놓고 면박을 줬단다. 김 이사 개인의 신상에 관련된 문제이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김 이사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은 것은 W테크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녹취록의 내용이 진실된 것으로 법원이 판단할 수밖에 없는 정황히 마련된 것.     


나는 다른 자료를 법원에 제출하며 열심히 다퉜지만 결국 1심에서 패소했다. 1심 결과에 불복하고 항소했지만 2심에서도 패소했다. 녹취록이 패소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W테크는 이미 돌려받은 착수금과 중도금 전액 및 이에 대한 지연이자, 그리고 손해배상금으로 약 6억 원을 D실업에 물어줘야 했다.


김 이사는 재판 도중 사직서를 제출하고 회사를 떠났다.     




대화 내용을 상대방이 몰래 녹음한 다음 이를 증거로 쓰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많다. 이런 행위를 처벌하는 법규가 없으니 이 부분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오늘도 여기저기에서 소송을 대비한 다양한 녹음이 몰래 이뤄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