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변호서의 Law Essay
자신의 상황이 절박한데도 다른 사람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지 못해 도움을 주려고 손을 뻗는 사람을 우리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 부른다.
내 것만 제대로 챙기고 살기에도 힘들고 팍팍한 세상.
도와줘야 할 의무가 없음에도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고 내 힘닿는 데 까지 힘이 되어주려 노력하는 대인민감도가 높은 사람들이 있다. 내 기억속의 광폭(廣幅) 오지랖 소유자 한 분을 소개한다.
각종 부품을 제조, 가공하는 업체인 세일정밀(주)의 정태섭 사장.
정 사장은 한 업체로부터 세일정밀 사업 부문 중 하나인 ‘자동차 부품제조부문’을 넘기라는 제안을 받았다. 세일정밀은 최근 몇 달간 극심한 자금난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은행에서 추가 대출을 받으려 했지만 담보가 모자라 쉽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활로가 필요한 상황.
정 사장은 고민 끝에 자식 같은 사업부문 하나를 넘기더라도 운영자금을 마련해서 기업을 생존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을 했다.
정 사장은 인수제안자와 여러 차례 협상 끝에 5억 원에 자동차 부품제조부문을 넘기기로 하는 ‘사업양수도계약’을 체결했다. 그 돈은 가뭄 끝에 단비처럼 세일정밀에게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정 사장은 이 일로 업무상 배임혐의 고소를 당했다. 고소인은 세일정밀의 주주인 배중렬씨.
자동차 부품제조부문은 세일정밀의 중요한 사업부문 중 하나이므로 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면 상법상 ‘주주총회 특별결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정 사장은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함부로 사업부문을 넘겨버렸으므로 상법을 위반한 것인데, 대표이사가 이처럼 상법을 위반하여 주주들의 동의도 받지 않고 회사의 알토란 같은 사업부문을 팔아버린 것은 ‘업무상 배임죄’에 해당된다는 것이 고소인 배씨의 논리였다.
정 사장은 당황했다. 사업부문을 넘길 때 계약서만 잘 쓰면 되는 줄 알았지 반드시 주주총회를 열어야 하는지 몰랐던 것. 특히 사업부문을 판 대가인 5억 원은 고스란히 회사로 유입되어 회사 운영을 위해 전액 사용됐다. 자신이 비록 상법상의 절차를 어겼다고는 하지만 회사에게 손해를 입혔다기 보다는 오히려 회사의 위기를 살린 것인데 업무상 배임이라니...
하지만 고소인은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 사장을 엄벌해 달라는 진정서를 추가로 제출했고, 그 때문에 정 사장은 경찰서, 검찰청에 5번 이상 소환 조사를 받았으며, 결국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나는 정 사장이 기소된 이후에 정 사장으로부터 사건 수임을 의뢰받아 형사재판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나는 고소인이 정 사장을 고소한 진짜 속셈이 무엇인지 파악해 보았다.
고소인 배 씨는 정 사장이 사회에서 알게 되어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 그는 세일정밀의 성장가능성을 보고 5년 전에 2억 원을 투자했다. 그런데 그 후 세일정밀이 예상처럼 빨리 성장하지 못하자 마음이 바뀌어 자신의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정 사장에게 요청했다.
사실 정 사장이 법적으로는 배 씨에게 투자금을 반환해 줄 의무가 없다. 왜냐하면 돈을 넣고 그에 대한 대가로 주식을 받아가는 ‘투자’는 돈을 빌려주고 나중에 기한이 지난 뒤에 무조건 이를 돌려 받을 수 있는 ‘대여’와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
예를 들어 어떤 이가 K라는 코스닥 종목이 유망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주당 5,000원에 매수했는데, 몇 달 뒤 그 종목 주가가 2,000원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K사에게 ‘내가 5,000원에 샀다가 손해를 봤으니 내가 투자한 원금을 돌려달라’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투자’에 따른 손실은 어디까지나 투자자의 책임에 속하는 문제다.
이처럼 정 사장에게는 배 씨의 투자금 반환요구를 들어줘야 할 법적인 의무는 없지만 도의적으로 미안한 마음에 어떻게든 빚을 내서라도 투자금을 반환해 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배 씨는 사업양수도 대금 중 일부를 빼서 자신의 투자금을 먼저 돌려주는 데 쓰기를 바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 사장이 그 돈을 전부 회사를 위해 투입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사업양수도의 절차상 하자를 문제 삼으며 정 사장을 업무상 배임죄로 고소했던 것.
고소인의 고소 의도는 불순했다. 하지만 이런 점이 수사과정에서 추분히 부각되지 못한 것 같아 나는 재판과정에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려 마음먹었다.
정 사장의 형사재판 제1차 공판기일.
나와 정 사장은 재판시간인 11시보다 30분 전에 법정에 도착했다. 정 사장은 많이 초조해 했다.
우리는 방청석에 앉아서 먼저 진행되는 사건을 지켜보았다. 11시 이전 사건들은 전부 국선변호 사건이었다. 예정된 5건의 국선변호 사건 중 4번째 국선변호 사건 공판이 시작되었다.
피고인은 사건 당일 자신이 일하던 유흥주점에서 서빙을 하고 있었는데, 술에 취한 손님(피해자 ; 45세 남성)과 옆자리 다른 손님(30세 여성)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피고인은 손님 간의 싸움을 말리려고 중간에 나섰다 남자 손님을 밀치게 되었고 때문에 그 손님은 넘어져 이빨이 2개 부러지고 안면에 찰과상을 입었다. 전치 6주 진단.
사건 자체로 봐서는 피고인이 억울해 보였다. 하지만 피해자 부상상태가 심한 것이 문제. 이런 사건은 피해자와 합의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흥주점 사장은 나 몰라라 발뺌을 했고, 피고인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합의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두고 ‘정당방위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법상 정당방위는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피고인은 상해의 가해자, 손님은 피해자일 뿐이었다.
피고인은 2년 전에도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인한 벌금 전과가 있어서 이번에 만약 합의가 되지 않으면 실형이 선고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피해자는 법원에 진정서를 제출해서 피고인의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고 밝혔다. 자기는 다쳐서 아프기도 하고 병원비도 많이 나왔는데 피고인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으니 단단히 화가 난 모양.
재판을 담당한 판사가 피고인을 딱하게 쳐다보더니 국선변호인에게 물었다.
“이 사건 합의 안 됩니까? 피고인이 고의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국선변호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피해자가 워낙 완강합니다. 합의금을 요구하는데 피고인 가정 형편상 이를 감당하기가...”
판사가 다시 물었다.
“피해자가 요구하는 합의금이 얼마입니까?”
판사는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거...참. 1,000만 원이면 그리 큰돈도 아닌데. 피고인 측에서 돈을 좀 구해볼 수는 없는 건가요?”
그때 갑자기 어떤 아주머니가 다리를 절뚝 거리며 판사 앞으로 걸어 나왔다. 법정 경위가 급히 제지하자 그 아주머니는 두 손을 모으며 “판사님. 제가 저 아이 엄마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자 판사는 경위에게 괜찮다고 손짓을 했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하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는 푸른색 수형복을 입은 아들을 쳐다보고는 말을 잊지 못했다.
판사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 어머니 되시는 분. 피해자와 합의 볼 수는 없습니까? 합의가 되면 벌금이나 집행유예도 가능할 텐데 말입니다.”
판사는 미련이 남는 듯 계속 국선변호인을 쳐다보더니 하는 수 없다며 재판을 종결지었다. 검사는 징역 1년을 구형했고 선고일은 2주 후로 잡혔다.
정 사장이 갑자기 내 손을 끌었다. 나는 정 사장에 이끌려 법정 밖으로 나왔다.
“변호사님. 저... 제가 저 친구 합의금을 대신 내줘도 되나요?
다른 사람이 합의금 대신 내주는 것도 가능한가요?”
“네?”
나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잠시 어리둥절했다. 정 사장의 눈에는 걱정스런 표정이 잔뜩 담겨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설명했다.
“뭐.. 합의금이야 피고인이 동의만 하면 대신 내 줄 수 있는 문제죠.”
“합의되면 저 친구는 풀려 날 확률이 큰가요?”
허허... 곧 자기 형사재판을 진행할 사람이 지금 남의 걱정을 하고 있다니.
“네. 합의만 되면 정상참작되어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로 석방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까 판사님도 그런 취지로 말씀하셨구요.”
정 사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방법이 있군요. 저 아주머니를 보니 돌아가신 제 어머니 생각이 나서... 변호사님. 제가 돈을 준비할 테니 저 친구에게 도움이 되도록 손 좀 써주십시오.”
나는 갑자기 바빠졌다. 국선변호 사건을 마치고 법정 밖으로 나오는 국선변호인에게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연락하겠다고 하고 서로 명함을 교환했다. 나와 정 사장은 서둘러 재판을 받으러 법정으로 들어갔다.
그 날 정 사장 재판은 간단히 끝났다. 검찰은 고소인 배씨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1달 뒤 다음 기일에는 배씨에 대한 증인신문이 진행될 예정.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국선변호인이 피해자에게 연락해서 합의금 1,000만 원이 준비됐다고 밝히고, 합의금을 받으면 ‘처벌불원서(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서면)’를 써주겠다는 확답도 받았다. 나는 정 사장에게서 합의금을 받아 이를 국선변호인에게 전달했다. 국선변호인은 합의금을 피해자에게 송금하고 피해자로부터 처벌불원서를 받아 법원에 제출했다.
2주 후 그 아르바이트생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형을 선고받고 그 날 석방됐다.
1달 후 정 사장 공판 기일.
고소인 배 씨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배 씨는 검찰측 증인이므로 정 사장의 업무상 배임여부를 입증하기 위해 출석한 것.
검찰측의 간단한 주신문(主訊問)이 끝난 뒤 나의 반대신문이 이어졌다.
나는 정 사장이 절차상의 하자(주주총회 특별결의를 거치지 않은 것)를 저지르긴 했지만 회사와 주주를 위해 손해를 끼칠 고의는 없었으며, 해당 사업부문 양도는 오히려 회사를 살리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배 씨는 철저하게 자기 입장에서 정 사장이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렇게 주신문과 반대신문이 끝나고 나면 재판장인 판사의 간단한 보충신문이 진행되기 마련이다.
재판장은 고소인이 자신의 투자금액을 돌려줄 것을 여러 차례 정 사장에게 요구하다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정 사장을 업무상 배임죄로 고소하고 수사기관에 여러 차례 진정서를 제출해서 정 사장을 곤경에 빠뜨린 부분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했다.
“고소인! 고소인은 세일정밀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겁니까 아니면 본인 투자금을 빨리 회수하고 싶은 겁니까? 말로는 세일정밀을 위해 고소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본인이 투자한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피고인(정 사장)을 압박하려고 무리하게 고소한 거 아닙니까?”
고소인은 재판장의 예리한 질문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재판 분위기가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했다.
2달 후 정 사장의 형사재판 1심 선고기일.
정 사장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회사의 특정 사업부문을 제3자에게 양도하면서 주주총회를 거치지 않은 것은 절차상 하자가 있지만.
① 그 특정 사업부문이 그 당시 왕성한 매출을 일으키는 등 중요한 사업부문으로 보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 그 사업부문의 양도에 반드시 주주총회 특별결의가 필요하다고 보기 힘들고,
② 사업부문 양도 대가는 전액 회사에 귀속되어 사용되었으므로 회사에 손해가 있다고도 볼 수 없으며,
③ 양도 대가도 적정하게 산정되었고,
④ 고소인은 자신의 투자지분을 회수하려는 의도에서 피고인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이 사건 고소를 진행한 정황 등이 보이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는 것이
무죄 판결의 이유였다.
며칠 뒤 나는 아르바이트생 국선변호인의 전화를 받았다.
“변호사님, 변호하신 사건 무죄 받으신 거 축하드립니다.
담당 판사님이 제 고등학교 선배입니다.
제가 정 사장님이 합의금 대신 내준 거 말씀드렸습니다.”
아, 담당 판사도 그걸 알고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나만의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정 사장 재판과정에서 판사가 정 사장을 바라보는 눈빛이 일반 피고인을 보는 것과는 좀 달라 보였다. 정 사장의 선행은 결국 돌고 돌아 정 사장 본인을 살린 셈인가..
정 사장의 광폭 오지랖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다보니 그 때 일이 생각나서 콧날이 시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