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 시절.
문학 청년을 자처하면서 온갖 문학잡지와 서적을 탐독하던 그 때.
우연히 알게 된 재일동포 작가 "김학영".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다카와 상을 수상(수상작 - "얼어붙은 입")했음에도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85년경 미망인과 아들 둘을 남겨 두고 자살.
자살의 원인은 본인을 끝내 괴롭히던 그 고민
바로
그의 아쿠다카와 수상작인 "얼어붙은 입" 역시 본인의 말더듬을 소설화한 것이다.
혹자들은 그럴테지.
"엉? 말더듬 때문에 자살을? 말이야 천천히 하면 되지 않나? 그것때문에 처자식 남겨두고 자살을 해? 말이 돼?"
난 정말 그 분의 책을 몇 번이나 읽으면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 분의 책 내용에 200% 공감했으니.
나 역시 심각한 말더듬 때문에 사춘기 시절, 몇 번이나 삶을 포기하려는 무모한 짓을 했었기에..
내가 말을 더듬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쯤으로 기억된다.
남들보다 성격이 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타인의 반응에 민감한 성격을 가진 나는
언제부턴가 내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이 원활한 대화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말더듬은 자의식이 싹트는 시기(중학교)부터 더 심화됐다.
말더듬이에는 크게 두 타입이 있다.
"태극기가 바..바... 바..람에...흐.....흐..흐흐흐..흔들립니다."
"ㅌ...ㅌ...태.태태..ㅌ....태태 ㄱㄱ"
나는 A타입을 거쳐 B타입으로 증상이 악화돼갔다.
말더듬 현상에 대해서 사실 타인들은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말더듬증상을 타인이 눈치챌까봐 서서히 두려워진다.
생활 곳곳에서 말더듬 증상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 1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줄곧 반장을 했었다.
그런데 수업 시작과 끝에 하는 그 놈의 "차렷", "경례" 구호.
말더듬이에게 어려운 초성 발음이 있다.
7교시 수업이 있으면 아침 조례와 종례를 합해서 총 9번, 그러니까 18번(시작할 때와 끝날 때 1번씩
하니까)의 "차렷,", 경례' 구호를 해야 한다.
막상 자리에서 일어서면 "차렷"이라는 발음이 안나온다.
머리속으로는 계속 대체음을 생각한다.
"아~렷", 또는 "하~렷" (-> 김학영씨의 "얼어붙은 입"에 바로 이와 같은 얘기들이 나온다. 이렇듯 말더듬이는 끊임없이 자기가 쉽게 발음할 수 있는 발음으로 말을 바꾸는 작업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고민을 할 수록 막상 일어서면 발음이 제대로 안된다.
얼굴은 뻘개지고, "ㅊㅊㅊㅊㅊ 타~..렷", "ㄱㄱㄱㄱㄱㄱ ㅕ ㅇ 례"
이놈의 짓을 하루에도 18번씩 하려고 하니 죽을 맛이다.
수업시작시간에 구령을 하고 나면, 수업 내내 '수업 마칠 때 내가 과연 구령을 잘붙일 수 있을까' 라는
고민때문에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선생님께 가서 반장못하겠다고 사정을 하지만
선생님은 "임마, 공부만 잘한다고 다가 아냐. 리더쉽도 길러야지, 반장 해!"라면서
거의 강제적으로 반장을 맡기셨다.
결국 나는 부반장에게 "내가 목이 아프니 좀 대신 구령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고육지책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2
방학때면 동생 데리고 시골 할머니댁에 가야 한다.
티켓팅을 하기 위해 줄을 선다. 동생 손을 잡고 있다가, 내 차례가 되면 "금동행 2장 주이소"라고
말하면 된다. 그런데 금동의 "ㄱ" 발음이나, 두장의 "ㄷ' 발음은 말더듬이에게 참으로 어렵다.
내 차례가 되었지만 창구에 서서 표 파는 누나 얼굴을 보면서
얼굴은 빨개질 대로 빨개진 채 "ㄱㄱㄱㄱㄱㄱㄱㄱ금......금..."이라는
신음도 아닌 신음소리를 내다가 얼른 동생이랑 그 줄을 빠져 나온다.
뒤로 와서 동생에게 대신 표를 사오라고 시킨다. 그리고 절망감에 사로 잡힌다.
#3
학교 시간에 제일 싫었던 것.
"어이, 반장,45페이지 부터 읽어봐."
꼭 그렇게 시키시는 선생님이 계신다.
그러면 그 수업시간 몇 시간전부터 내 마음은 두근반 세근반이 된다.
그리고 내가 읽어야할 부분을 편 다음, "말 바꾸기" 작업을 한다.
"감정"이라는 단어는 "암정"이라고 표시해 두고 "두터운"이라는 단어는 "우터운"이라고 대체해 둔다.
그렇게 해봐도 역시나 막상 읽기 시작하면 듣는 내가 화가날 정도로 더듬거린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시절, 날 기억하는 친구들은 '정말 말이 없는 친구다'라고 기억하고 있다.
거의 일상적인 대화를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집에만 오면 괜찮아 진다는 것.
정말 편한 사람들이랑 있으면 말은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나온다.
(또는 아주 어린 애들과 얘기할 때도 말더듬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집에서는 참으로 모범생 아들이었다.
하지만 대문밖만 나서면 지극히일상적인 대화도 하지 못하는 아이.
그것이 바로 중고등학교 시절의 내 모습이었다.
정말 당시 내 소원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좋은 대학을 가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일상적인 대화를 편안하게 할 정도의 수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바보처럼 굴었나 싶기도 하다.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면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말더듬 클리닉"에라도 가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어린 마음에,
우리 집에서 유일한 기대주인 내가,
사실은 자기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하는 말더듬이라는 사실을
부모님께 알린다는 것은 도저히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아주 2중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는 모범생, 대문 밖만 나서면 기본적인 의사표현 조차 하지 못하는 무능아.
결국 항상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기에
책을 보고 글을 쓰는 일에 몰두했고, 학과 공부도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아버님은 내가 꼭 법대에 가시길 원하셨다. 우리 집의 기대주.
어려운 가정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은 나 하나 보고 사셨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당시 인기리에 방영되던 외화 중
"하바드 법대의 공부벌레들"이라는 시리즈가 있었다. 킹스필드 교수가 나오는 그 외화.
그런데 그 드라마를 보니, 법대생들은 전부 토론식 수업을 하고 있었다
(물론 미국이라서 더 그랬다는 것을 한참 뒤에서야 알았지만).
일상적인 대화도 하지 못하는 내가, 저런 식의 토론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내가 그 당시 공부는 좀 잘했지만, 도저히 말더듬이라는 핸디캡을 안고서는 법대 면접에서 탈락하거나 어찌 어찌 입학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정상적인 법대 생활을 해 낼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절망감에 빠졌다.
그리고 아주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16년, 평균수명을 70살로 봤을 때, 내가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 54년.
16년의 삶이 이렇게 힘들었는데, 앞으로 남은 시간을 도대체 얼마나 더 고통속에 살아야 할 것인가?
너무 힘들다.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다.
결국 극단적인 짓을 저지를 결심을 하고 두어차례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그 순간마다 떠오르는 것은 부모님의 얼굴.
내가 이런 짓을 저지른 후 나를 발견하시게 된 부모님의 심정은 어떨까....
그래서 결국 그 짓도 성공하지 못하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고2 겨울방학 무렵 문득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 바보야. 넌 왜 도대체 계속 도망만 다니냐. 한번 정면으로 부딪혀 봐야 하지 않나? 진정 용감하게 싸워보지도 않고 왜 그러냐?'
사실 그랬다. 말더듬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할 따름이지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은 별로 많이 하지 않았다는 반성이 들었다.
몇가지 구체적인 action plan을 세웠다.
그 당시까지 내가 선생님께 질문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용기를 내서 선생님께 질문을 한가지씩 하기로 했다. 수학이 가장 약했기에 수학을 보강하자는 복합적인 목적을 가지고 말이다.
처음 몇 번은 수업 마치기 직전에 문제집 풀다가 모르는 문제를 들고 나가서
"ㅈㅈㅈㅈ저.... ㅅㅅㅅㅅㅅ선생님....이...ㅁㅁㅁㅁ문제...."
라고 문제를 지적하면 선생님이 설명을 해 주신다.
처음엔 정말 죽기보다 싫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어느 정도 선생님과 대화도 되었다.
"오필리아~ 그대의 영롱한 눈빛에 내 두려움이 눈 녹듯 사라지고~~"
마치 연극배우가 된 것 처럼 또박또박 발음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보통 집에 오면 2-3시까지 그 짓을 계속 하고 있었다.
우선은 나보다 어린 초등학생들에게 말을 건다. "이 근처에 약국이 어데 있노?"
어린애들에게 말을 할 때는 말을 덜 더듬는다. 왜냐하면 애 들은 내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이처럼 말더듬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인식하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다).
몇 번 성공한 후에는 점차 연령대를 올려 가면서 질문을 계속해 본다.
사실 나에게 있어 고3 시절은 대학시험 준비 못지 않게 그동안 빌빌거리고 도망만 다녔던, 두려움의 대상인 말더듬과 정면 승부를 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런 노력을 계속하다 보니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말문이 트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뭐라 표현하기 힘든 성취감이 들었다.
결국 학력고사를 치고 난 이후 대학 입학 시점에는 내 말더듬이 많이 고쳐져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2학년때까지는 계속해서 연습을 했다.
천천히 말하는 연습, 또박또박 말하는 연습....
특히 대학에 들어와서는 계속 애들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그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지금도 매달 여러 차례 강의를 다니고 법정에서도 꽤나 많은 구두 변론을 한다.
어디서 말을 하든 사람들이 나보고 그런다.
"거 참, 말을 잘하네요. 경상도 사람치고 사투리도 별로 없이 말이지..."
변호사 한 이후로 말 잘한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다.
내가 '말'로 먹고 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일상적인 대화만이라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바랬던 어느 말더듬이가 참으로 출세했다.
이 독특한 경험을 통해 내가 느끼고 배운 것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말더듬이로서 절실하게 느낀 것은,
고민은 철저히 "일신전속적"이라는 점이다.
결코 내 고민을 타인이 이해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잘 쓰는 표현으로 "홀애비 사정은 과부도 모른다. 홀애비 사정은 홀애비만 안다"는 것이 있다.
말더듬이는 말더듬이를 금방 알아본다. 같은 반에 있던 다른 말더듬이가 책을 읽으면서 고통스러워할 때 다른 친구들은 "아이... 자식... 답답하네..."라고 짜증을 내지만,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나는 그 친구의 그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마음이 아픈 것이다.
즉,내가 겪어 보지 못한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는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
그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공감하고 도움을 주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중, 고등학교 학창시절. 나는 친구와 대화라는 것을 거의 해 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책을 읽었고, 글을 써댔다.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책속의 진리를 접하게 됐고, 외면보다는 내면의 가치를 더 중시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지금도 한번씩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나태해 질때는 고3때 내 모습을 돌이켜 본다. 말더듬과 싸워보려고 노력하면서, 지지 않으려 애썼던 그 모습들.
그 때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아울러, 지금 이 순간 정상적으로 언어생활을 할 수 있는 현재의 모습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곤한다.
인생에 있어 진정 자신을 키워주는 것은 고통스런 경험이다.
오늘 문득, 어느 분이 내게 "조변호사님은 정말 말씀을 잘하세요."라고 하시길래 예전에 고이고이 접어두었던 추억의 편린들을 꺼내 보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1SRra6AKyy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