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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Mar 10. 2016

검사가 못 된 이유

조우성변호사의 법과 인생

나는 1991년에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2년간 연수생활을 거쳤다.

 

1992년 1년간은 사법연수원에서 다양한 실무 교육을 받았고, 1993년은 법원, 검찰,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정 기간 수습 과정을 거쳐야했다.

 

당시 나는 당연히 연수를 마치면 검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다 공무원 출신이셨기에 항상 입버릇처럼 “우성이는 반드시 검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나 역시도 사회정의를 위해 신념을 가지고 불의와 맞서는 검사의 모습을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3년 1월부터 4월말까지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판사시보(試補 ; 수습) 생활을 마치고, 1993년 5월부터 8월말까지는 부산지방검찰청에서 검사시보 생활이 예정되어 있었다.




부산지방검찰청에 출근하면서 나는 앞으로 내가 몸담을 검찰을 미리 경험해 본다는 설레임을 갖고 마음이 들떴다.

 

검사님실에 배속을 받은 다음 작은 책상을 하나 놓고 거기서 검사님의 일을 보좌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직접 피의자들을 앞에 두고 경찰에서의 진술과정을 재확인한 다음 보완할 내용을 적어서 하나의 조서(피의자신문조서)를 꾸미는 것이다.

 

검사시보들에게는 복잡한 사건은 배당되지 않고 이미 경찰에서 자백한 사건, 경미한 사건들이 주로 배당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내가 처음 맡은 사건은 소위 ‘아리랑치기’ 사건이었다.

 

‘대학생인 김00군은 1993년 4월 0일 23:30경 부산 북구 만덕동 000 주변에서,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피해자 최00의 양복 윗주머니에서 지갑을 끄집어 내어 그 지갑 안에 있던 현금 5만 원을 절취했다’는 것이 범죄사실의 요지였다.

 

이처럼 술 취해 정신이 혼미한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속칭 ‘아리랑치기’(절도)라고 한다. 만약 술에 취한 사람이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폭력을 행사하면 그 때부터는 속칭 ‘퍽치기’(강도)가 된다.

 

김군은 마치 근처를 순찰하던 방범대원에게 적발되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고, 이미 경찰에서 범행 일체를 자백했기에 불구속으로 수사받는 중이었다.

 

김군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면서 왜 이런 범행을 저질렀는지 물어보았다. 사정이 참으로 딱했다.

 

김군의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중이었는데 꽤 큰 수술비가 필요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밖에 없어서 현재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김군 뿐이었기에 김군은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근처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그 날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피해자를 발견했고, 그 피해자가 몸을 뒤척일 때 양복 안주머니가 불룩한 것을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나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설명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일단 범죄사실에 대한 진술을 정리한 뒤, 김군의 딱한 사정을 최대한 자세히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했다.

 

그리고 김군이 현재 대학교에서 장학생이며, 학교에서 봉사상을 받은 내역도 알아내어 피의자신문조서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작성된 피의자신문조서를 검사님께 검사 맡기 위해 보여 드렸더니 검사님께서는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으시며, ‘조시보님. 이건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가 아니라 변호인이 작성한 변론요지서 같습니다. 이 아래 부분은 전혀 필요 없는 부분입니다. 지우세요.’라고 말씀하시고는 김군의 딱한 사정에 대해 기재한 부분을 지적하셨다.

 

사실 검사님의 말씀이 옳았다. 형사 사법 시스템의 구성요소인 판사, 검사, 변호사는 각자의 역할이 있는 법이다. 검사는 범죄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과 입증을 해야 하고, 변호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정상참작 사유를 최대한 주장해야 하며,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의 주장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나는 검사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변호사로서의 주장을 한 셈이다. 난 머리를 긁적였다.

 



다음 사건은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사건’이었다.

 

‘직장인 박00는 1993년 4월 0일 21:45경 부산 중구 남포동 000번지 소재 포장마차에서 옆자리에 있던 피해자 길00(17세, 고등학생)과 시비를 가리던 중 격분하여 위 피해자를 주먹으로 가격하여 안면부 타박상 등 전치 3주에 이르는 상해를 입혔다’는 것이 범죄 사실이었다.

  

멀쩡한 직장인이 무슨 이유로 고등학생을 때렸을까 솔직히 한심한 생각이 들어 폭행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좀 더 자세히 물어봤더니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그 날 박씨는 친구와 같이 포장마차에 들렀다가 옆자리에서 아주 시끄럽게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담배를 피고 있던 길군을 보게 되었다. 장교출신인 박씨는 고등학생들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점잖게 ‘어이, 학생들, 좀 조용히 하지?’라고 타일렀다. 그러자 길군은 ‘거참. 씨팔. 아저씨는 아저씨 일에나 신경쓰쇼!’라면서 대꾸했다.

 

생각지도 않은 반응에 화가 난 박씨는 일어나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너 학생아냐?’라고 소리쳤고, 길군은 ‘학생이든 뭐든, 당신이 연필 한자루라도 사 줬소?’라면서 대들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밀치다가 박씨가 날린 주먹이 길군의 뺨을 강타하고 말았다.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마 그 상황에 처했다면 나도 아마 박씨와 비슷하게 행동했으리라.

 

역시 피의자신문조서에 공을 들였다. 일단 범죄사실은 간단하게 쓰고, 당시 왜 박씨가 길군을 때릴 수밖에 없었는지, 정말 설득력있게 써 내려갔다. 아마 이 피의자신문조서를 읽다보면 누구라도 박씨의 편이 될 수밖에 없도록.

 

울분에 찬 눈빛으로 피의자신문조서의 검토 결과를 기다리는 나에게 검사님은 다시 혀를 끌끌 차며 말씀하셨다.

 

‘허허, 조시보님. 그럼 조시보님 의견은 피의자를 처벌하지 말자는 겁니까? 아니 검사가 그런 입장을 취하면 도대체 법질서는 누가 지킵니까? 이 아래 부분은 피의자신문조서에서는 전혀 필요 없는 부분이니 싹 지우십시오.'

 



그렇게 나의 검사시보 생활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게 시작되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문득 ‘음, 검사란 직업이 내 적성에 맞지 않나?’라는 생각을 심각하게 됐다.

 

내 동기들 중에는 피의자가 아무리 자기 사정을 이야기해도 ‘그건 당신 사정이고, 어차피 잘못은 저질렀잖소? 그 사정은 변호인에게 이야기하세요.’라면서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의 범죄행위와 그 사람이 처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4개월의 검사시보 생활을 마치면서 내린 결론은 내 적성이 검찰이란 조직과는 잘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런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검찰에서 일을 한다면 나도 힘들 것이고, 검찰이란 조직에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국 나는 검찰이 아닌 변호사의 길을 택했고, 내가 수습생활을 했던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1997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할아버지께서 내 이름을 ‘도울 우(祐)’, ‘정성 성(誠)’으로 지어주시면서 당신 손주가 평생 남들을 돕는 마음으로 살 것을 바라셨다고 한다.

 결국 이름 따라 가게 된 건가.

 

변호사로서 20년간 생활하면서 가장 뿌듯한 점은, 기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면서(물론 일정한 대가를 받지만) 업무를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마다 자기에게 맡는 일이 있으며, 이를 거슬러 살기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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