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운 ‘용어’가 아이들의 이해를 가로막는다. 우리나라 학자가 연구한 내용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을 쓰거나 아니면 한자어라도 자주 접해 본 단어일 수 있는데 저 멀리 스위스의 소쉬르가 사용한 ‘기표’와 ‘기의’를 또 저 멀리 프랑스의 라캉이 다시 자신의 이론에 가져와 쓰는 바람에 가르치는 나도 힘들고 아이들도 더불어 힘들다.
‘용어’의 어려움은 아이들에게 단순한 문장조차도 이해할 수 있는 에너지를 약화시키고 동시에 도전 의지를 꺾는 부작용이 있다. 사실 알고 보면 그 용어들이 가지는 의미는 그렇게 어려운 뜻이 아니다. ‘기표(記表, 프랑스어: signifiant 시니피앙)’나 ‘기의(記意, 프랑스어: signifié 시니피에)’는 ‘말로 표시되는 것’과 ‘말로 표시되는 것에 포함되는 뜻’ 정도로 풀이될 수 있는데 아이들은 왜 그것을 구분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 아마도 언어습관이거나 아니면 생각의 방식 차이겠지만 아이들이 그 정도 생각을 넓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설사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여전히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아이도 의문을 정리해서 묻지 못한다. 아직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물어볼 능력이 없다. 아니 지금의 대학생 또는 나 자신도 그럴 수 있는지 자신이 없다.
서양 철학의 구조를 몇 마디로 표시한다는 것은 매우 건방진 일이지만 중학생 정도의 인지 수준으로 말해 본다면 ‘얼개’가 핵심어일 것이다. 즉, 짜임새와 구조를 밝히는데 모든 것을 건다. 생각의 짜임새와 구조를 밝히는데 언어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 언어로 표시함에 있어 또 몇 가지의 문제가 있다. 입에서 나온(발화된) 말이 가지는 다의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 즉 이 다의성이 '욕구'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하여 ‘욕망’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소쉬르는 다시 ‘랑그’와 ‘파롤’이라는 대단히 모호한 단어를 도입하는데 오히려 사태의 파악에 혼선을 주기도 한다. (‘랑그’와 ‘파롤’에 대한 설명은 아이들에게 잠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운데 어려운 단어를 자꾸 이야기하게 된다.)
다시 ‘욕망’으로 돌아가 보자. '욕구'를 언어로 표시하고 그 과정에서 충분히 표시되지 못한(즉, 결핍) 상황에서 ‘욕망’이 발생한다는 라캉의 이야기를 아이들은 이제 희미하게 이해하는 표정이다. 라캉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사실까지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 ‘욕망’의 의미를 찾아 내려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아이들은 모호해한다. 반드시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그들의 집념을 여전히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여 내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 그래서 말이야 우리는 여전히 거대한 철학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는 거야”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아이들이 모두 피식 웃는다. 이심전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