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출장 탓에 목요일 하는 철학 수업을 오늘 하게 되었다. 오늘은 매슬로우 욕구 단계설에 대하여 공부하는 날이다. ‘라캉’에 의하면 ‘욕구’란 ‘욕망’으로 분화되기 전에 존재하는 인간의 감정으로서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단계이다. 하지만 매슬로우가 말하는 ‘욕구’가 라캉의 그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매슬로우는 ‘needs’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욕구’라고 번역되었고 따라서 ‘라캉’의 ‘욕구’와 개념적 차이가 분명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의미로 수용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생각이나 상황(욕구)을 위계의 관계로 나타낸다는 것은 조금은 허망한 일이다. 하지만 매슬로우의 학설이 별다른 저항 없이 수용된 이유는 이미 우리는 여러 종류의 가치 기준을 근거로 우리의 ‘욕구’를 분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종교적 도덕적 기준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욕구’들은 ‘高低’나 ‘優劣’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매슬로우가 5단계(제일 저급한 단계)로 분류해 놓은 ‘생존 욕구’가 과연 저급한 단계의 욕구일까? 본능이 가장 낮은 단계라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 속에 존재하는 종교적 도덕적 신념의 영향은 아닐까? 이 욕구는 마땅히 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아이들에게 어려운 이야기지만 차근차근 이야기하면서 반응을 본다.
어쩌면 서양의 기독교 문화에서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몸의 ‘욕구’야말로 ‘저급한’ 것이라는 인식의 영향이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설의 근거일 것이다. 4단계인 안전의 욕구나 3단계인 사회적 욕구 또한 인류학적 또는 문화적 배경에서 등장한 이론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매슬로우 이야기는 조금만 하고 현재 우리가 느끼고 있는 ‘욕구’를 이야기해보게 했다. 모둠별로 서로 이야기하고 결과를 이야기해보니 아이들이 가장 강하게 느끼는 ‘욕구’는 의외로 ‘자유’에 대한 ‘욕구’였다. ‘학교를 다니는 것이 행복하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답변 앞에 교사로서 내 입장은 참으로 모호해졌다. 아이들이 말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는 2021년 대한민국에서 허락될 수 없는 ‘욕구’이자 ‘욕망’이다.
어떻게 수업을 마무리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욕구(망)’의 방향이라는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결국 이 이야기의 종착역은 가치 기준이 개입된 것임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는 알고 있다. 방향의 문제는 늘 가치 기준의 문제와 충돌한다. ‘답정너~~’ 흔한 도덕 수업으로 전락하려는 순간이다.
스스로 체념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방향의 문제는 스스로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 선택에 영향을 주는 것은 오로지 나의 의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존재인 우리는 넓게는 관습과 문화, 그리고 좁게는 제도와 법의 범위 내에서 우리의 ‘욕망’을 실현해야 한다. 완벽하게 혼자만의 선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욕망’, 혹은 ‘욕구’의 실현 또한 그러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역시 이 '욕망'의 이야기는 결론이 어렵다.
아이들은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종이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