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를 보면서 든 생각
오늘 국회에 출석하여 영혼 없는 말들을 주억거리는 소위 재벌로 불리는 오물 같은 인간 여럿을 보며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화를 삭이는 방법으로 이런 생각에 도달했는지도 모르겠다.
언어와 생각의 先, 後가 있는가?
있다면 무엇이 先이고 무엇이 後인가?
언어란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내거나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음성·문자·몸짓 등의 수단 또는 그 사회 관습적 체계로 정의된다.(두산 동아) 이 정의대로라면 생각이 먼저 있고 그다음이 언어라는 것이 옳다. 하지만 생각의 바탕에 언어라는 체계가 없이 생각이 구성되기 어렵다는 것은 조금만 고민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또, 생각의 각 부분이 이미 언어적 방식을 통해 인식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위의 정의는 수정되어야 될 부분이 없지 않다.
단지 전달과 표현 수단으로써만 언어가 존재한다면 언어(영어 language의 어원은 13세기 말에 나타난 langage, 즉 ‘말로 표현되는’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의 함의는 매우 축소될 가능성이 많다. 일정한 생각의 전달과 표현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 언어라면 생각의 표현을 위해 언어의 습득은 필수 불가결한 것인데 이 말을 좀 더 확장해보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생각이 없다는 말로 바뀔 수 있다.
이 논리대로라면 동일한 문화권에서 어린이의 생각은 성인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다른 문화권으로 확장하면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그 언어를 습득하지 못했다면 그 문화권의 아이와 같은 생각으로밖에 볼 수 없는 다소 엉뚱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체계로만 정의되는 언어는 일정하고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면 언어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생각과의 先, 後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언어는 과연 사유 체계에 선행하여 존재하여야만 하는 것인가 혹은 사유 체계가 다시 논리적인 체계로 변화한 것인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장자 제물론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의문에 해답은 아니지만 생각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말로 짐작된다.
有有也者(유유야자) : 있음이 있고,
有无也者(유무야자) : 없음이 있고, (없음이 있다. 논리적 오류가 아니라 없음이라는 상황, 즉 비어있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有未始有无也者(유미시유무야자) : 없음이 아직 형성되기 전도 있고, (그러니 그 상황 이전의 단계도 존재할 것이고)
有未始有夫未始有无也者(유미시유부미시유무야자) : 없음이 아직 형성되지 전의 그 전도 있다. (역시 같은 이유로 그 이전의 상황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2300년 전 장자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처럼 속도의 시대가 아니다. 그리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사람들에게 이해를 강요하지 않았다. 아주 부드럽고 완곡하게 사태를 설명하여 진심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장자는 희망했을 것이다. 그러한 방법론으로 장자는 자신과 시대의 갈등을 조심스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시대와 권력, 그리고 오늘 본 저 천박한 자본과 불화를 정리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