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량과 비량

by 김준식
Kazimir_Malevich,_1915,_Black_Suprematic_Square,_oil_on_linen_canvas,_79.5_x_79.5_cm,_Tretyakov_Gallery,_Moscow.jpg Black Square, 1915. Tretyakov Gallery Moscow.

더위가 무섭다. 더위를 이기는 방법은 생각을 집중하여 더위를 못 느끼게 하는 방법이 있다. 매우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 생각이 집중되기도 한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불교의 인식 논리학(일반적으로 유식불교)에서는 우리가 앎을 획득하는 방법에 現量(현량)과 比量(비량)의 두 가지가 있다.(본래는 삼량이다. 여기서는 非量은 제외한다.) 불교에서 ‘량(量, Pramana)’은 ‘증거’ 또는 ‘지식의 수단’ 등의 의미로서 유식불교의 인식론(Epistemology)에서 핵심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현량은 ‘직관’이고 비량은 ‘추리’다. 예를 들면 불이 타오를 때 눈으로 이를 보거나 몸으로 온기를 느끼는 것은 현량을 통한 것이고, 멀리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면, 느낄 수는 없지만 그곳에 불이 있을 것이라고 아는 것은 비량을 통한 것이다. 이를테면 현량은 ‘감관을 통한 직접적인 앎’이고 비량은 경험적 사고 작용을 거친 '간접적인 앎’이다.


현량에서 말하는 직관과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1941)의 직관은 비슷한 면이 있다. 이를테면 베르그송은 직관을 ‘지능’이나 ‘지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파악하였는데 유식에서 말하는 현량 또한 그 의미와 비슷하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직관은 먼저 의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의식은 보여진 대상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직접적인 시각에 의한 의식으로서 접촉과 일치되는 인식이다. (위의 예에서 불을 보는 것)


하지만 불교의 유식론은 베르그송의 이야기와 이내 결별하고 만다. 결국 깨달음이란 현량과 비량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으로 향하는데 반하여 베르그송은 직관의 속성에 천착할 뿐,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결국 불교의 깨달음은 현량과 비량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데 수많은 선사들의 득도 이야기에서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그 경지를 넘어선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중국 선 불교 제6조 慧能(혜능)은 제5조 弘忍(홍인)으로부터 衣鉢(의발)을 전수받았으나 대중의 시샘으로 박해를 받아 남쪽으로 도피했다. 그 의발을 빼앗으려고 뒤쫓는 자들 중에 무사 출신의 발 빠른 慧明(혜명)이란 자가 있어 뒤쫓아 왔다. 이에 혜능은 혜명을 직접 만나 이렇게 물었다.


“善도 생각하지 말고, 惡도 생각하지 말고 들어 보시오. 나의 의발을 찾아 멀리 달려온 이러한 때 그대(혜명)의 본래면목은 어떤 것이오?”


혜능의 한 마디 물음에 문득 깨달음을 얻은 혜명은 혜능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이때 혜명의 깨달음이 直指人心 見性成佛(직지인심 견성성불)이고, 이후 선가에서 본래면목이란 말을 자주 쓰게 됐다. 여기서 본래면목은 혜능이 가진 의발을 뺏으려는 마음을 비롯한 온갖 생각들을 다 떨쳐낸 고유한 자기,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자기를 뜻한다. 즉, 우리의 본래 모습, 중생이 본디 지니고 있는 순수한 심성을 말한다.


이 이야기에서 혜명이 깨달음은 현량을 통해서 일까? 아니면 비량을 통해서 일까?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면 혜명의 독립적인 證得(증득)일까?


표지 그림은 저 유명한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9-1935)의 그림이다. 저 검은색 사각형을 보고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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