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의 명상

by 김준식


덥다. 다른 감각이 아무 소용이 없다. 느낌조차 열기에 기화된다. 하지만 엄중해지기로 한다. 하여 복잡한 세계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1. 공간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신들이 생겨나기 이전의 공간을 카오스(Chaos)라고 불렀다. 신들이 생겨나기 이전이기 때문에 사물은 존재할 수 없으니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다. 따라서 혼돈이라고 번역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혼돈보다는 오로지 ‘비어있음’이라고 말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플라톤은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코라(chōra)라는 공간을 창안해낸다. 헤시오도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코라는 이데아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즉, 만물의 생성과 소멸이 일어나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더 진보하여 현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점유하는 장소, 혹은 공간을 토포스(topos)라고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현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점유하는 공간이 있다는 말은 그에 상응하는 질서조차 부여되었다는 의미도 있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등 원자론자들은 원자의 활동을 위한 자유롭게 열린 공간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캐논(kenon, 허공)이라고 불렀다. 이들을 계승한(異論이 있음) 로마의 스토아학파들은(원자론을 계승한 사람들 답게) 장소를 미분적 개념으로 이해하여 물체 사이의 사이 공간으로 이해함으로써 물질적 세계 바깥에 항상 있는 허공(kenon)의 존재를 주장한다.


헤시오도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생각한 공간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원자론자들을 계승하였다고 생각되는 스토아학파가 상정한 공간은 매우 개방적이다.


현대의 물리학, 수학, 천문학 등에서 정의하는 공간은 각각 미묘한 차이가 있다.


더위를 실체로 규정한다면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실체이므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실체가 겹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더위는 없다. 하지만 더위라는 실체가 거대하고 동시에 조밀하기 때문에 우리가 점유하는 공간마저 이미 채웠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덥다.



2. 용


우리 동네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금호지라는 정식 이름이 있지만 다른 이름도 많다. 그 연못이 생성된 전설에 ‘용(龍)’이 등장한다.


'용'에 대한 이야기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각 국의 고대문화에 대부분 등장한다. 세상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용’의 전설은 인류문화와 함께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동양권에서 '용'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는데 그 시작점은 중국의 상나라(은나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쨌거나 ‘용’은 구름을 부르고 여의주를 통해 신통한 조화를 일으키는 상상의 동물로 우리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용’은 또 하나의 상징성이 있다. 보통의 사람보다 월등한 존재, 큰 업적을 이룬 존재를 일컬을 때 가끔씩 ‘용’이라는 상징적 용어를 쓴다. 그런데 이 상황을 되짚어보면 우리의 인식 바닥에 엎드려있는 매우 특별한 계급의식과 만나게 된다.


보통의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존재이거나 보통의 우리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진 존재를 상정하는 자체가 매우 계급적 인식일 수 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능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해 내는 특별한 존재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복종의 표현이다. 그 우월한 존재에 대한 추종과 숭배의 의미로 쓰였던 ‘용’이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21세기 상황에서도 유효한 것인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여전히 ‘용’의 출현을 기다리는 뉘앙스를 우리들의 인식 곳곳에서 발견한다. 이미 ‘용’은 죽었고 ‘여의주’를 물고 조화를 부리는 장면은 거대한 사술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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