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댓글에 대한 생각
어제 홍범도 장군 이야기 말미에 카자흐스탄 이야기를 조금 했다. 우리나라와 문화적 공유가 있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몇몇 페친께서 신문에 난 기사를 예시로 들어주시며 생각의 확장을 에둘러 막는 듯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거기에는 몇 가지 우리의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완전히 나의 경우지만, 다른 사람의 글 아래 쓰는 댓글을 매우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한다. 치우치지 않기 위해 꽤나 노력하면서 댓글을 쓴다. 어제의 내 글 밑에 있는 신문기사 링크는 이런 예로 짐작해 볼 수 있다.(신문이라는 객관적 매체를 동원하여 나의 이야기로부터 확장될 수 있는 이야기를 제한하고 동시에 스스로의 범위도 제한하려는 심리적 작용으로 이해됨)
또 하나는 본문 글에 대한 동의와 공감을 좀 더 세련되게 하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지식과 경험 가치까지 담고자 노력한다. 이것은 거의 외줄 타기와 비슷한데 자칫 본문을 무시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쉽다. 늘 경계하는 부분이다.
2. 어제 쓴 글(홍범도 장군 이야기 말미의 카자흐스탄 동전 이야기)과 우리 上古史에 대한 생각
우리 상고사는 마치 깨진 유리처럼 중국의 여러 책 여기저기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서 대부분 그저 학설 정도이거나 심지어는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되기 일수인데, 이것은 12세기에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1145년 완성)가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인정받은 가장 오래된 正史이기 때문이다. 12세기라니…. 단군이 나라를 세운 해가 B.C.2333년인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삼국사기에는 우리 상고사가 거의 없다. 삼국시대가 역사의 처음이다. 당시의 역사관이나 시대관으로 볼 때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중국의 송나라가 늘 노려보고 있었고 심지어는 이 책을 송나라에 가져다 받치기까지 했으니 언감생심 상고사 이야기를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 참 뒤, 중국이 어수선할 무렵 민간에서 쓴 삼국유사(1281년 완성)에 처음 단군신화가 등장할 정도이다.
세간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우리의 상고사가 기록된 ‘환단고기’의 위서 논란과 이미 종교화된 증산도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보면서 한반도 상고사는 여전히 안개 속처럼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의 상고사는 존재하였는데 그 유물이나 유적, 그리고 여러 가지 역사적 삼각 검증에 의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다. 심지어 매우 체계화된 국가로서 그 규모나 강역이 거대했다는 것이 중국의 문서에 의해 조금씩 밝혀지고는 있지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주류 역사학자들은 이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주류 역사학자들은 모든 것을 牽强附會로 몰아가고 있다. 왜 그럴까? 이유는 식민사관도 있을 것이고 위험을 무릅쓰고 새 학설을 펼칠 용기가 없을 수도 있다. 이미 강단에 서 있는 자신이 완전히 증명할 수 없는 사실을 발표하여 논란의 소지를 일으킬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오히려 주류 학계에서 배척되어 자신의 명성과 여러 가지 기회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우리 상고사를 밝힌다고 해서 아무도, 누구도 그 일을 칭찬하거나 열광하지 않는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학자로서 양심과 현실이 만나면 언제나 현실이 승리하는 법이다. 심지어 이것은 과학처럼 절대 진리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우리의 정부가 온 에너지를 모아 우리 상고사를 밝히고자 하는 열의가 있는가? 단연코 없다. 해방 이후 모든 정부가 정권에 눈이 멀어 백년대계라고 말만 하는 교육문제에도 관심이 없는데, 상고사는 무슨 상고사! 그런 생각을 하는 나의 오지랖이 그저 웃기다. 이웃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거대 역사 프로젝트를 국가적으로 주도하며 자신들이 동양 상고사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어 이 일을 여전히 진행하고 있다. (2007년 공식적으로 종료하였으나 2020년 이후에도 암암리에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