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졸업생의 전화
전화가 걸려왔다.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곤란하다.) 올해 대학을 졸업하였고 로스쿨 진학을 위해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능성은 놔두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마음이 착잡하다. 충분히 다른 일을 해도 되고 사실 대학 전공도 거리가 좀 있는 아이였는데…..
법학이나 의학은 사회가 근대화되면서 평민들이 할 수 있는 신분 상승의 통로였다. 이것이 어려우면 사업을 해서 돈을 벌었다.(유태인들이 이 셋에 집중했다. 그리하여 지금 미국 주류 사회에서 가장 많은 수의 변호사와 의사, 그리고 증권사의 직원들을 보유하고 있다.) 돈을 엄청나게 벌면 변호사나 의사를 근대 이전의 귀족들처럼 자신의 종처럼 부릴 수도 있지만, 머리 좋으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법-의대보다 빨리 출세와 돈을 쥘 수 있는 방법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데 2017년 우리나라는 그 길 중 하나를 제도적으로 완전히 막았다. 즉, 사법시험을 폐지했다. 물론 의학전문대학원도 폐지되고 의대가 부활했지만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고교 졸업생은 0.1%도 되지 않는다. 돈이 지원해주는 아이들(자사고, 특목고 졸업생이 의대생의 90%가 넘고 나머지도 돈이 만들어 낸 아이들이다.)이 장악한 의대도 머리 좋은 돈 없는 평민들에게는 이미 거대한 진입장벽 그 자체다.
따라서 요즘은 변호사도 의사도 돈이 지배하기 때문에 공부 잘하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좁은 문이 되었다. 법대가 실효적 권한을 잃자 이제 똑똑한 아이들은 대학의 진로 선택에서 경영대학이나 자유전공, 사회대로 방향을 틀고 입학하자마자 로스쿨(가난하면서 똑똑한 아이들은 행시에 몰린다. 곧 이 시험도 손을 본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외무고시도 이미 폐지되었다.)에 들러붙고, 이과는 전국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의대 중심으로 서열화되어 버렸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최고 인재들이, 법학이나 의학을 하려는 게 아니고, 가능한 방향(즉, 출세와 돈이 보장되는 – 이 나라에서 이 만큼 거대한 가치는 없어 보인다.)으로 가려는 것이다. 아니 매달리고 심지어 목숨을 거는 꼴이다. 나라에 망조가 든 게 분명하다. 자본주의의 최악의 단계가 현재 이 나라의 현실인 셈이다.
자본주의 하면 미국이다. 그 미국도 제일 우수한 두뇌가 월가(돈이 모이는 곳이다.)로 몰리는 판국이니 말할 필요도 없다. 정말 똑똑한 아이들이 사태를 장기적 시각으로 보면서 여러 가지 학문도 하고 다양한 모험도 하고, 법관이나 의료 쪽은 적당한 머리에 품성이 좋은 사람들이 맡아주고, 이러면 사회는 균형을 잡을 것이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건전한 방향으로 발전도 할 것인데…… 이런 유토피아적 생각은 뭐 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할 것이다.
2015년인가 장하성 교수가 이런 시류를 비판하면서 획일성을 운운했는데 이제는 그건 비판조차도 없다. 정말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2. 돌연 양생주가 생각난다.
<양생주>에는 백정이 등장한다. ‘삶을 가꾸는 기예’라는 <양생주>에서 소를 잡는 백정은 어떻게 삶을 가꾸었을까? 포정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방편으로 소 잡는 일을 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는 부질없는 질문이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소를 잡는 모습은 이러했다.
"손으로 잡고, 어깨를 밀착시키고, 발로 밟고, 무릎으로 누르면서 칼질을 하니 살점이 쓱쓱 떨어졌습니다. 쓱싹쓱싹 살이 갈라지는 그 소리가 마치 상림의 무곡 같았고 경수의 음악 같았습니다."
포정은 맨 처음 소를 잡을 때를 “소가 통째로만 보였다”라고 설명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고 19년이 지난 지금은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기술 또한 변해갔음을 의미한다. 시간이 많은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갈수록 절실하게 느끼는 지혜이다. 포정이 소를 잡았던 시간의 흐름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치 아닐까?
포정이 소를 잡는 모습을 보자. 목숨이 끊긴 소를 잡아 어깨에 걸친다. 무릎과 발로 소의 무게를 나눈다. 그리고는 “더없이 얇아 두께가 없는” 칼날로 소의 뼈와 살을 갈라내니 “쓱싹쓱싹” 하는 소리가 음악 소리로 들린다. 포정에게 사는 것은 소를 잡는 일이다. 장자는 포정이 소를 잡는 기술에 드리운 삶의 기예를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일을 해서 명성이 나는 것도 나쁜 일을 해서 형벌을 받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삶의 인연으로 소 잡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자신을 지키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삶이 소를 잡아 온전해지는 날들이었다. 누구나 사는 삶이지 않은가. 그런데 장자는 여기서 아무나 하기는 어려운 순간을 포착해 냈다. 포정은 말한다.
"여전히 뼈와 살이 엉겨있는 곳에 이르면 긴장하여 조심하게 됩니다.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고 움직임은 느려지고 칼의 움직임은 미묘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마치 흙더미가 저절로 무너지듯 획~하고 소가 해체되어 땅에 떨어집니다.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비로소 일의 결과를 알아채고 흐뭇해합니다."
“뼈와 살이 엉겨있는 곳”에 이르러 포정이 품게 되는 긴장과 그로 인한 집중. 숨 쉬는 생명활동은 혼자 할 수 있으나 삶은 함께 엉겨야 하는 것이니 그 엉김 속에 긴장하고 집중하라. 참으로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되지 않는 일이 아닌가? 포정은 삶의 순간에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고 미묘한 순간을 경험하는 순간 일은 마무리되었고 삶은 온전해진다.
모두 포정이 되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