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이 되니 여기저기서 유용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오늘 뉴스를 보니 모 방송국에서 제법 유명하던 PD가 모 캠프에서 한 자리를 맡은 모양이다. 쓸모 있는 사람인지는 알 수도 없고 동시에만 그 ‘쓸모’가 과연 ‘쓸모’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쓸모!
이 ‘쓸모’는 『장자』 ‘인간세’에 등장하는 ‘장자’적 사유의 대표적 예이다. ‘장자’적 사유란 이전까지 존재해왔던 유교적 체제 순응 논리와 인과 예의 권위적 세계관을 파기하는 것이다.
‘인간세’는 일곱 개의 에피소드로 되어있다.
전반부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공자, 안회 섭공, 안합, 거백옥 등으로 역사적 혹은 유가적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 유가적 인물은 장자 안에서는 장자적 사유를 설명하는(역설적으로)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후반부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남백자기, 지리소, 접여 등의 ‘장자’적 인물이다.
‘장자’적 주인공은 성 밖 남쪽에서 사는 비주류 지식인(南郭子綦남곽자기=南伯子綦남 백자기: 오상아의 주인공), 혹은 심한 불구자(支離疏지리소) 혹은 반쯤 미친 사람(狂接輿광접여)이다. 그러니까 ‘장자’의 담론 전략은 유가적 인물을 등장시키되, 그들로 하여금 유가 담론을 비틀어 도가적 발화(發話)를 하게 하거나 아니면 합리적 이성과 그것의 육체적 표현인 온전한 육체를 지닌 유가적 인물과 완전 대칭적인 소수자를 ‘장자’적 주인공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장자』를 읽는 재미가 여기에 있다. 아마도 ‘장자’가 오늘날 인물이라면 유가 집단의 악성 댓글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심재를 말하는 앞 세 개의 에피소드 속에서 주인공들은 당대 지식인이 처한 현실적 고뇌의 두 가지 양상을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고뇌하고 있다. 그 처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안연(회)이다. 그는 無道한 세상(위나라)에서 목숨을 걸고라도 세상을 바꾸겠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고민을 스승(공자)에게 풀어놓고 거기로 가서 그 일을 하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다음 이야기는 무도한 세상의 무도한 군주가 명을 내렸을 때 그 명이 목숨을 걸고라도 수행할 가치가 있는 것인 것 하는 섭공, 안합의 의문이다.
그러면 왜 ‘장자’는 유가의 인물을 자신의 담론으로 끌어오려 했을까? 그 이유는 공자의 논리를 이용하여 자신을 드러냄과 동시에 공자의 모순을 공자적 사유의 틀로 와해시키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논어에 이르기를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위방불입, 난방 불거. 천하유도칙견, 무도칙은”)”(논어, <태백>)은 유가적 지식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 태도이다. 즉 위태로운 곳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머물지 마라. 천하에 도가 있으면 곧 행할 것이요, 무도이면 즉시 몸을 숨겨야 한다. 그러나 ‘장자’ 속에서 공자는 안회에게 이렇게 말한다. “治國去之 亂國就之(치국 거지 난국 취지)” 즉,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로 들어가야 한다. ‘장자’는 공자라는 이름을 이용하여 유가 전체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안회가 위나라(무도한 나라)로 들어가려 하자 중니(공자)는 안회를 막으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중니가 말했다. “너는 가봤자 처벌받는 일이 고작일 게다. 저 도란 번거로움이 있으면 안 돼. 번거로움이 있으면 일이 많아지고 일이 많으면 혼란해지며, 혼란해지면 근심이 생기고, 근심이 생기면 남을 구할 수가 없어. 옛날의 지인은 먼저 자기부터 도를 갖추고 나서 남도 갖추게 했다.(古之至人, 先存諸己 而後存諸人)” 고지 지인, 선존제기 이후 존 제인? 익숙하지 않은가? 바로 유가의 ‘修己治人’과 완벽하게 같은 표현이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위나라의 포악한 태자를 보좌하러 떠나가야 하는 안합이 거백옥에게 처신을 묻자, 거백옥이 “戒之 愼之”하라고 당부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戒’와 ‘慎’은 ‘戒愼恐懼(계 신공 구)’<중용>로 집약된 유가 修己의 핵심적 수양법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매우 유가스럽다. 그렇다면 경계하고(戒) 삼가면서(愼) 자기가 먼저 보존해야 하는 ‘장자’적 사유의 道란 무엇인가?
‘장자’적 사유(즉, 자기 수양의 출발)는 하늘이 부여해준 천명(‘天命’)을 잘 보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명을 보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완전히 등지는 은둔자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상 속에서 살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라면서 시류에 영합하면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논리대로라면 ‘장자’의 도는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자기 털 올 하나 내어주지 않으려는 자신만 보존하려는 극단적 이기주의라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장자’는 여기에 새로운 논리를 편다
‘장자’는 이 부분에서 오히려 글을 읽는 우리에게 획기적인 발상을 전환을 요구한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道란 과연 무엇인가? 어쩌면 그 道라는 것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달은 절대적 자유의 경지이거나 혹은 세상사의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초연함, 심지어 삶과 죽음을 넘어선 초월의 경지를 말한다면 그것은 ‘장자’의 道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이러한 장황한 道의 논리와 ‘생과 사’의 문제 두 가지가 있다면, ‘장자’가 생각한 우선과제는 그 생과 사의 문제이므로 ‘장자’는 2300년 뒤의 우리에게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과 시류에 영합하는 문제도 생존 이후의 문제이지 생존의 문제와 우열을 다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20세기의 실존주의 그 원류가 어쩌면 ‘장자’의 사유로부터 출발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장자’가 생존했던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언제 어디서든 징집되어 죽음의 전쟁 판에 내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찬가지로 실존주의도 세계 대전을 거치며 그 어떤 문제보다도 실존의 문제를 넘는 것은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장자’는 새로운 주장을 편다. 바로 무용지용의 논리다. 즉, 쓸모의 잣대를 버리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가장 큰 잣대가 유용성, 즉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일 것이다. 여기서 쓸모란 바로 위에서 말한 道의 기준들인데 세상을 모두 이해하고 남음이 있을 정도의 진리나 그 진리를 깨닫는 것, 초월의 신비한 경지로의 끝없는 행진이다.(사실 거의 불가능하고 또는 처음부터 그런 경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그리고 그 쓸모가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나름대로 애를 쓴다. 쓸모없는 인간! 그 존재 가치를 판단하는 가장 치명적인 기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쓸모없으면 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쓸모를 버린다는 것은 ‘오상아’와 ‘물화’를 거쳐야만 가능한 경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쉬운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애매한 자유의 경지가 아니라 세상사와 내가 둘이 아니며 세상이 곧 내가 되고, 내가 곧 세상이 되는 그런 자유의 경지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장자’의 나비에서 구체화되는데 이는 회피와 관조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진지한 이해가 바탕이 되는 참여일 수 있다. 즉 ‘장자’는 避人之士(피인 지사)와 避世之士(피 세지사)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세>의 후반부는 ‘쓸모’에 대한 이야기다. 장석이 만난 사당 나무와 남백자기가 상구 땅에서 본 커다란 나무는 인간들에게 별 쓸모가 없었던 까닭에 오랫동안 잘리지 않고 살아왔다. 사당나무는 장석에게 ‘너나 나나 같은 物인데 나의 쓸모를 판단하려 하느냐’며 꾸짖고, 남백자기는 쓸모없는 나무에서 신인을 본다.
쓸모없는 나무도, 그리고 神人도 인간에게는 쓸모가 없다. 그러니 이 ‘쓸모’라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히려 송나라 땅 형씨 지방의 쓸모 있는 나무들은 그 쓸모 때문에 재난을 겪었고, 이마가 흰 소나 코가 들린 돼지들과 같이 제사에도 못쓰는 동물들이 행복하게 산다.
인간도 마찬가지. 지리소는 그 지리멸렬한 생김새 덕분에 징집되지도 않고 부역도 면제받으며 곡식과 장작을 지원받으며 일상을 잘 살아간다. 나무나 동물, 인간의 몸에 이어 마음의 덕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인간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