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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신, 무식, 비굴, 어정쩡함

공직자의 덕목인가?

by 김준식


이 나라의 공직자들이 어찌 저 지경일까!


고등학교 교장 자리는 저들 나름대로는 제법 고위 공직이다. 목에 힘 깨나 준다. 하지만 오늘 나는 그 교장이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허상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내가 있는 학교 교장은 교육자로서는 그런대로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일로 그 모든 가능성을 거두고 60대 노인, 그것도 무식하고 용감한 박사모와 비슷한 사람으로 처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대충 이러하다.


우연하게 대화 중에 대통령 미용 시술문제가 주제로 등장했다. 그러자 교장이 이렇게 이야기 했다.


“지금의 대통령이 미용시술을 했다는 것이 뭐가 나쁜가? 돈 좀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마누라들도 다 하는 일 아니냐?”


이 발언의 문제점을 지적해 보면,


먼저 논지가 틀렸다. 미용시술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 비용이 국가예산, 즉 세금이라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학교 행정실에서 미용시술 재료(주사제)를 공금으로 사서 교사들에게 수업 중에 시술해 주는 것과 다름 없다. 만약 이런 일이 생겨도 지금처럼 이런 반응을 보일까?


둘째 미용시술 당사자의 위치와 시기, 그리고 장소의 문제이다. 돈 있고 권력있는 사람들의 마누라들은 사인이다. 사인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미용시술을 하는 것을 시비 걸 사람은 없다. 하지만 대통령은 공무원으로서 고도의 도덕적 윤리적 의무를 부담해야 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직위다. 그 대통령이 일과 시간에 미용시술을 했다면 형평의 원칙에 따라 징계해야 한다.


공적인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대통령이라는 직위는 이러한 엄격한 도덕적 기준이 적용되어야 할 최후의 보루이다. 그런데 그 권력의 장소인 청와대 관저에서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매우 충격적인데 더군다나 2014년 4월 16일 우리 아이들 300명 이상이 아무런 이유도 모른 체 배에 갇혀 바다에 빠져 죽은 날에 이 시술을 했다면 이것을 누구 누구의 시술과 비교할 수 있는 문제인가 말이다.


아마도 교장이라는 자리가 사람을 이렇게 만든 모양이다. 그 동안 어정쩡하게 눈치나 보고 사태를 관망하며 자리를 보전해 온 전형적인 처세형 인물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마치 학생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위장전술로 사람들을 기만했으나 이런 순간, 의도하지 않게 자신의 본모습이 백일 하에 드러나는 것이다.


‘장자’라는 책에서 공자의 처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처신, 비굴, 어정쩡함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공직자의 자세를 본다.


섭공자고와 중니의 대화는 사신으로 등용된 섭공자고가 군신 관계의 처세를 묻는 내용이다. 『논어』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자장(이름은 전손사(顓孫師)고, 자가 자장이다. 공자(孔子)보다 48살 연하다. 『논어』에 공자가 그를 다른 제자들과 견주면서 독특한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 볼 때 특수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 녹을 구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공자가 말했다. “많이 듣고 의심 나는 것은 잠시 유보하며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하면 허물이 적게 될 것이다. 많이 보고 미심쩍은 것은 유보하며 그 나머지를 삼가 행하면 후회가 적게 될 것이다. 말을 하는데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으면 녹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듣기에는 참으로 합리적이나 따지고 보면 용기 없음이요, 눈치보기다. 또 완전히 저 자세이다. 따라서 이런 것이 공무원의 태도일 것이라고 여전히 이 국가는 생각할 것이다.)


섭공 자고의 질문은 훨씬 구구 절절하다. 사신으로 가게 된 자신의 처지는 성공과 실패 모두 해로울 뿐이라 한탄하며 이 재난을 어떻게 헤쳐 나가면 좋을지 묻는다. 중니의 대답은 한 술 더 떠서 세상 어디를 가나 떠날 수 없는 군신관계이니 운명이라 여기고 오직 충실히 일을 하고 자신을 잊으라 한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속담을 전하며 대답을 갈무리한다.


“평소에 있는 그대로를 전하고 지나친 말을 전하지 않으면 우선은 안전하다.”

“군주의 명령을 고치지 말라. 성공하려고 무리하게 권하지 말라.”


니미럴!!


무도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지위와 그에 해당하는 책임을 바르게” 해야 함을 강조한 공자에게 신하의 말은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에 목적이 있다. 그러나 그 말을 따를지 말지는 오로지 군주의 마음이니 간언이 반복되면 욕을 당할 것임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섭공자고의 두려움이 비롯되는 지점이며 공자의 어정쩡함과 비굴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물론 장자라는 책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마땅히 그러한 “의”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논어의 공자라면, 장자는 “그저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제물) 마음을 유유히 자유롭게 풀어놓고(소요유)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몸을” 맡기라고 한다. 전제국가에서 군신관계란 생사여탈권이 군주에게 있는 현실에서 이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같은 처방을 내리니 말이 오가는 가운데 신뢰를 쌓기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말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비굴함이 또, 무식이 앞을 가로막는다.)


안합과 거백옥의 대화에서 장자는 군주를 대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호랑이와 사육사, 말을 사랑하는 마부와 말의 관계에 빗대어 때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화를 입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당부한다. 군주가 절도 없이 굴면 같이 절도 없이, 방종하면 함께 방종해지는 것이 때에 맞는 행동이다. 장자처럼 움직여도 사실 문제는 있다.


공자라면 어땠을까? 유가에서 최고의 인격자라 일컬어지는 군자라면 “반드시 그러해야 함도 없고 그러지 말아야 함도 없으니 오로지 '의'에 따를 뿐”이라 했다. 누구의 '의'인가? 사납고 부덕한 군주 앞에 두 사람이(공자와 장자) 서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의 행동이 절도가 없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를 했다. 어떻게 할까? 나는 두 사람의 행동이 다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유연함을 위장한 비굴함이 아닐까? 동시에 무식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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