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하게 연휴가 지나갔다.
1. 조상과 제사, 그리고 명절
어릴 적부터 나는 선친으로부터 조상에 대한 예의와 범절, 그리고 의례와 관련된 여러 종류의 문서와 양식에 대하여 배웠으며 동네에 있던 우리 조상들의 행장을 쓴 비문과 조상들이 쓴 책들을 읽고 또 익혔다.
10대를 넘어서는 내 성씨의 본향인 의성에 가서 이런 일들을 거듭 배우고 익혀 20대 초반부에는 집안의 대소사에 거의 관여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 머릿속에는 뼈대 있는 집안에 대한 자부심과 스스로의 지식과 역량에 대한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구라도 이런 문제에 대하여 시비를 걸어오면 속으로는 상대를 대단히 비하하면서 겉으로는 아주 논리적으로 대응했던 기억이 있다.
40대를 넘기며 선친이 작고하시고 나의 이런 생각에 큰 변화를 준 것은 다름 아닌 나 스스로의 의문이었다. 과연 이 모든 것을 지킬만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40대 내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죽은 자를 위한 예법의 허망 함에 대하여 많은 고민과 고민을 거듭했고 마침내 일정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50대는 그런 결심을 실행에 옮기고 준칙으로 생각해 오던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파기하는 시기였다. 선친께서 돌아가심으로 해서 자연스럽게 집안의 여러 권한들이 대습 되었고 그에 따라 몇 백 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집안의 여러 일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단 하나는 조상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다. 이번 설에도 물론 코로나가 있었지만 설날 제사는 우리 집에서 우리 식구가 먹는 것과 같이 떡국으로 아침 상을 차려 가볍게 예의를 표시하고 식사를 하는 것으로 제의를 대신했다. 맑은술 한 잔 올린 것이 평소와는 다른 유일한 것이었다.
물론 다른 제사의 양식도 존중한다.
2. 변화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들 중에 이 두 개의 극단적인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물(水)이다. 물은 그 어떤 형태도 스스로 변화하여 수용한다. 즉 형태를 특정할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 물 고유의 성질은 그대로 유지한다. 즉 변하지 않는다. 옛적부터 많은 현자들과 성인들이 물을 道에 비유한 것도 이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장 쉽게 변하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들의 변화는 용서될 때도 있다. 하지만 변해 버린 사람은 쉽게 수용할 수 없다. 전자는 겉모습에 핵심이 있다. 반면 후자는 마음을 가리킨다. 사람들의 마음은 쉽게 변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아주 미묘한 경계가 있다. 변했다가 돌아 올 수도 있고 반대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변했다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변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 또 문제가 있다. 본래 상황이나 상태가 어떤가에 대한 논의가 개입되면 이 이야기는 매우 복잡해진다. 이때부터 온갖 이론과 철학과 심지어 종교적 해석이 부가되어 애당초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조차도 혼선이 생긴다.
또 하나의 변수는 시간이다. 시간은 무차별적이라 정의역이나 치역이 존재할 수 없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수학적 함수 관계는 아니다. 논리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들이 변한 것을 쉽게 알아차린다. 참 이기적인 사람의 마음이다.
명절을 지나면서 사람들의 변화와 변하는 사람들을 본다. 도에 이르지 못했으니 타인의 변한 모습만 보인다. 내가 변했는지도 모르는데 자꾸만 타인의 변한 모습만 보인다. 그리고 그 처음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 처음이 항상 옳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하여 명절 동안 자기반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우울함이 나를 무겁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