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나무, 우주 그리고 나.

by 김준식

2015년 3월에 쓴 한시


花中之宇宙 꽃 속의 우주


妙蘂華中在 (묘예화중재) 가는 꽃술, 꽃 속에 있고,

其處又衆匱 (기처우중궤) 거기, 또 끊임없어라.

春日微暐灑 (춘일미위쇄) 봄 날, 가는 햇살 흩뿌리니,

炯發幽庶色 (형발유서색) 그윽한 색으로 빛나고 있네.


봄날 꽃이 핍니다.

얇은 꽃잎 속에 있는 암술과 수술을 보고 있으면 욕망 없는 번식이야말로 우주적 관점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을 제외한다면 번식이란 곧 우주적 사건인 셈입니다. 물론 인간의 경우에도 늘 예외는 존재하기는 합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 작은 풀꽃들은, 지난해에도 또 올해도 그리고 이 지구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늘 이때쯤 피어 날 것인데, 그 조건 없는 반복이 가지는 함의에 대해 우리의 섣부른 지식으로 판단하고 분석하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하며 심지어 위험하기 조차 한 것인지요? 하여 우리는 엄숙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하고 또 그들을 보내며 우리의 짧은 삶을 사는 것이겠지요.


3월 27일 오후, 아파트 앞산 사이사이로 흰 꽃이 선명합니다. 지난봄 이후로 나무들은 줄곧 이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왔겠지요? 또 지금 저 꽃잎이 바람에 흩어지고 그 자리에 열매를 맺고 떨어지면, 변함없이 같은 일들이 반복될 것입니다. 벌써 몇 억년 동안을 저 나무들은 그 일을 반복해왔고 나는 나의 삶 동안 그 모습을 관찰할 것이고 때가 되면 또, 그렇게 나무들로부터 나의 짧은 삶은 잊힐 것입니다.


나와 나무들, 혹은 꽃들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총량은 우주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안타깝게도 너무 짧아 이렇다 할 관계의 정립이 되기도 전에 나는 소멸할 것이고, 꽃이나 나무 또한 그 소멸의 궤적에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여 나무와 내가, 꽃과 내가 서로 마주하는 이 순간은 우주 전체에서 기막힌 우연의 순간이며 너무나 짧은 순간이겠지요.


오로지 나의 관점에서, 내가 바라 봄으로서 비로소 꽃과 나무가 존재하니 이것을 ‘현상(現象)’이라고 가정한다면, 나의 시신경을 통해 전달되는 꽃과 나무의 존재는 내가 보기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봄으로서 비로소 존재하는 것인지 문득 불분명해집니다.


여기서 인식론이 개입하겠지만 오늘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당연히 꽃은 나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또 존재할 것이지만 나와의 관계라는 지극히 한정된 범위 안에서는 나의 인지를 넘을 수 없는 한계도 분명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내가 존재하는 이 상황도 어쩌면 나 외의 모든, 또는 어떤 것으로부터 관계의 역학이 작용하여야만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에 대한 논리적이고 확실한 정의를 내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존재론의 범위를 넘는 문제이며 어쩌면 종교적 문제로 귀결될 공산이 크기도 합니다.


관계의 역학이 미치지 않는 곳은 우주에서 단 한 곳도 없다고 가정한다면 나의 존재로부터 동시에 저 꽃과 나무가 존재한다는 논리가 형성되는데 이것은 애 당초 인식했던 내가 꽃과 나무를 보는 장면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이 기막힌 변증법적 논리의 끝에 무수하게 가지를 뻗는 실체와 관계를 생각하면서 3월 말 오후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오전은 꽃들을 찾아 산 길을 걸었으니 다행입니다. 다가오는 한 주일도 행복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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