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뉴스를 보니!

by 김준식



지난 1992년에 실상사 선우도량 운동의 연장선에서 시작된 화쟁위원회의가 있었다. 불교 전래 1600년이 지난 이 나라에서 그나마 썩어 문드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출가자들의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이제 보니 그저 중들의 친목회 수준이었나 보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소식조차 없다.


화쟁 사상(和諍思想)이란 모든 논쟁을 조화시키려는 불교사상으로 신라시대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에서 비롯돼 원효(元曉)에 의해 집대성됐다. 원효의 화쟁 사상은 이론상의 집착에서 벗어나 부정과 긍정의 극단을 버리고 논쟁(諍)과 조화(和)의 양면성을 인정하면 경전에 대해 보다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상호 대립적인 쟁론을 지양할 수 있다고 보았다.



21세기 자본과 패권, 기득권이 난무하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종교가 가지는 의미는 ‘장식성’ 그것이 전부다. 종교인 그들은 이미 속인들보다 더 완벽하게 부패했고, 회생 불능의 경지에 이른 지 오래다. 불교 일각에서는 부처의 초기 경전으로 돌아가 그 청정심을 회복하려 하지만 이미 도를 넘은 부조리한 관행과 자본의 거대한 논리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대한민국 모든 사찰마다 부처 탄생을 전후하여 벌어지는 추악한 돈벌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해마다 보는 허접한 비닐 등이 올해도 이미 사찰마다 걸려있다.



2022년 3월 30일, 뉴스를 모처럼 보니 부처의 이름을 팔아먹는 세력들이 오늘 15대 종정 추대법회를 가졌는데 종정으로 추대된 사람이 법상에 올라 추상같은 법어를 해야 함에도 격에 맞지 않는 국민 화합을 들먹인다. 지금 상황에서 화합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종정으로 추대된 자리에서 어울리는 법어가 아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차라리 말을 말지…. 딱 이 정도가 이 나라 불교의 수준이다. 산문 앞에서 입장료 받는다는 이야기 때문에 대한민국 온 사찰에 항의 현수막이 걸리는 일사불란함도 이 나라 불교의 모습이다.



불교에서 경계하는 네 가지 교만한 마음을 사만 이라 부른다.



사만이란 네 가지 자만(自慢)하는 것을 말함인데, 만(慢)은 산스크리트어 māna의 의역이다. māna란 자부심, 불손, 독단 등을 말하는데 한자로도 그 뜻이 충분히 풀이된다. 즉, 慢은 마음 심(心)과 멀 만(曼)으로 되어 있고, 다시 멀 만(曼)은 가로 왈(曰)과 무릅쓸 모(冒)와 또 우(又)로 되어있다. 그 뜻을 새겨보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라 해석된다. 좀 더 의역해보면 자신의 잘 못을 보고도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자만(自慢) 거만(倨慢) 오만(傲慢)등의 단어가 떠 오르는데 지금 한국 불교는 사만에 빠져있다.



이 땅에 들어온 지 정확하게 1650년이 되는 불교여!



불교도의 노래는 온갖 친일 행적이 가득한 서정주가 작사를 했다. 그래도 내용은 나쁘지 않다. “삼계에 고해에 불을 밝히고 ……… 용맹이여 오라…… 타는 불처럼……우리에겐 죽음도 이미 없도다….” 이 정도다. 친일 시인이 쓴 가사라고 해서 비난하자는 것은 아니다. 먹물 옷 입고 머리 깎은 사부대중의 스승이신 분들이 용맹은커녕, 터진 노른자처럼 속세와 더불어 살고자 하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