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교육

Episteme(에피스테메)

나의 견해로는...

by 김준식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이 2017년초를 관통하고, 나는 55년 동안 그래왔듯이 그 일로부터 가깝거나 혹은 이 만큼 떨어져 있다. 이것은 일종의 惰性인데 그 타성의 근원은 나의 천박하고 얕은 지식(Doxa)에서 기원할지도 모른다.


만약 나의 의식 속에 현상에 대한 확연하고 분명한 논리체계와 지식(Episteme)이 존재했더라면 현재의 나의 태도보다는 분명하게 진일보한 태도를 취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Episteme의 본래 의미는 'know how to do, understand' 즉 일의 처리 방향과 그 일의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푸코(Michel Foucault)는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를 에피스테메라 칭했다.


Episteme의 반대 쪽에 Doxa라는 단어가 있다. 이 또한 꽤나 어려운 철학적 용어이기는 하지만 쉽게 그리고 일반적으로 풀이하자면 '근거가 박약한 지식'을 말한다. 이 이야기는 플라톤으로부터 기인하는데 한자로는 臆見(억견)으로 쓴다. 억견이라는 표현이 정확한 해석인지 알 수 없지만 2017년 세상의 풍경은 이 억견을 진리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臆이란 가슴이 답답한 상태를 뜻하는 한자이기 때문에 한자적인 뜻은 Doxa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앞에서 밝힌 것처럼 나 자신의 지식의 범위가 Doxa의 범주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지식인들 대부분이 이 억견에 사로잡혀 정말 아무런 학문적 성과도 없는 내 생각에도 거의 근거가 없는 것들을 진리라 우기고 심지어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지난주 헌재에서 대통령 변호인들이 주장하는 이야기들은 거의 이 억견의 극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플라톤은 객관적 관념론자였는데 그는 진리를 실체로(이데아의 핵심) 인식했다. 위대한 플라톤이 정의한 억견은 이 진리의 반대쪽에 자리 잡고 있는 부정확한 것들이다. 그리고 부정확은 분명하게 진리와 거리가 멀다고 선을 그었다. 물론 지금의 우리는 진리와 억견이 혼재된 세상에 살다 보니 혹시 플라톤이 다시 이 세상에 온다 하여도 쉽게 진리와 억견을 구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억견을 저들의 권세와 비굴한 학식을 동원하여 그것을 진리로 포장하여 이야기하는 불한당들을 보고 있자니 분노와 참담함이 교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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