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중턱에서

by 김준식

1. 樺花紛紛


꽃잎이 하염없이 떨어지는 풍경을 며칠 째 보고 있다. 봄이 깊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징표다. 바람 따라 흩뿌려지는 희고 작은 꽃잎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삶의 한 모퉁이에 언제나 웅크리고 있는 쓸쓸함 또는 서글픔과 마주한다. 약간 비관적인가?


벚꽃 한 잎이 공기를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광경은 『장자』에서 말하는 物化의 순간이다. 살아오면서 저지른 스스로의 오만과 독선을 반성하면서 꽃잎의 최후를, 그 기막힌 물화의 순간을 본다.


2. 나이


나이가 들면서 ‘누구’와 만나도 좋아야 되는데 요즈음은 ‘누구’를 만나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자신을 가끔 발견한다. 떨어지는 꽃잎은 어떤 땅이든 가리지 않고 평화롭게 세상에 흩뿌려지는데…… 나 역시 그와 같이 누구를 만나든 좋은 느낌을 가지도록 마음을 다스려야......


또, 나이가 들면서 매일 조금씩 자신을, 그리고 주위의 상황을 접는다. 쉽게 말하자면 포기요, 달리 말하자면 단념이며 체념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남겨야 할 것이 별로 없을 때 육신도 그리 되리라.


3. 바람


아직은 지난해 나온 억센 댓잎이 봄바람에 가볍게 소리를 내며 출렁거린다.


봄날이 깊어지고 있는 증거들이다. 바람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 알 수 없는 공기의 흐름은 흔적도 없이 나무를 흔들고 잎을 흔들며 마침내 나를 흔든다. 나의 내부를 흔든 바람 탓에 내 영혼 곳곳에 흩어져있는 감각의 촉수가 흔들리게 되고 그로부터 새로운 영감이 돋아난다.


시원성에 근거하여본다면 고작 몇 개의 시각적 신호이거나 아니면 단순한 촉각이나 경험의 기억 이상의 것도 아닐 텐데 스스로는 그 감각의 촉수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부터 전혀 새로운 장면으로의 전환을 꾀한다. 인간의 사고 작용이란!


즉, 바람으로부터 일어나는 몇 가지의 감각적 추론은 새로운 형태의 논리적 구조를 획득하게 되고 그로부터 다시 중첩적 기억으로 나의 뇌 어디쯤 쌓여 갈 것이다. 오늘의 기억은 지금 유효하지만 내일이 되면 유효성을 장담할 수 없다. 그것이 감각이고 기억이다. 흐려지는 것에 우리는 가끔씩 절망하지만 따지고 보면 흐려지지 않는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바람은 아직 잎도 나지 않은 느티나무와 열매부터 불쑥 나온 오리목을 흔들고, 낮게 깔리면서 제법 모양이 생긴 크로바 잎과 쑥부쟁이와 이름 모를 잡초를 흔들더니 이내 잠잠해진다.


4. 관계


관계의 전제는 ‘나’ 그리고 ‘외부’라는 '실체'에 의존한다. 우리말로 '실체'를 쉽게 설명할 길이 없다. 번역의 오류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말에는 이런 개념을 가진 단어가 거의 없다. 그래서 한자어를 빌려 이렇게 표기했다. 실체는 영어 Substance를 번역한 말이다. Substance는 희랍어 히포케이메논(hypokeimenon; 물질, 기질로 번역됨)을 라틴어로 번역한 수브스탄티아(substantia) 또는 수브스트라툼(substratum: 層 아래에 있는 또 다른 層)에서 유래한다.


관계는 다양한 속성을 가진 ‘나’ 그리고 ‘외부’ 전체가 대상이다.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은 그 실체의 속성이 여러 모로 잘 맞아떨어진다는 증거이고, 훼손은 속성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일 것이며 복원은 충돌 부분이 사라지거나 그 조차도 맞아지는 것인데 여기에는 인간에게만 특별히 존재하는 화해, 이해, 배려라는 기제가 작동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녹이 슬기도 하고 윤이 나기도 하며 끊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실체가 복원되기도 하는데 복원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야 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토요일,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소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