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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 자본주의의 민 낯

by 김준식



중학교 시절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썼다는 ‘중단 없는 전진’이라는 글을 국어 시간에 배운 기억이 있다.(교과서 거의 맨 앞에 있었다.) 내용은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70년대 초반) 내가 사는 지역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침마다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이 땅에 자본주의가 시작될 무렵의 분위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약 50년이 지난 2022년 지금 우리 삶의 모습은 어떤가?


20세기 이후의 역사만 한정해 본다면 확실히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사회주의 경제체제보다는 우월한 것은 사실이다. 사회주의(계획경제)를 표방하던 여러 나라의 경제적 몰락은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태어나고 자라 나이를 먹은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자본주의에 Liberal이라는 형용사가 수식되면서 자본주의는 그 성정이 포악해지기 시작했다. Liberal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 즉 free choice(자유 선택)이 가지는 ‘힘의 논리’가 자본주의에 부가되면서 정치와 법이 그것을 보장하게 되고, 힘 있는 자가 더 많은 선택을 하게 되는, 그리하여 마침내는 힘 있는 자 위주로 모든 것이 평정되었던 고대 신분사회처럼 변해버린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이것을 통상 학자들은 ‘야수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더불어 보통의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천민자본주의라는 용어도 있지만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니다.


우리나라에 고위 공직자 인사 청문회가 도입되면서 민중들이 알게 된 사실은 그들의 ‘野獸性(야수성)’이었다. 야수의 특징은 오직 하나로 귀결된다. 이를테면 ‘자기 충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는 포악함’이다. 아프리카 사자들이 사냥하는 장면을 잠시라도 보면 그 포악함과 잔인함, 즉, 야수성에 치를 떤다. 그 야수성을 그대로 인간사회에 옮겨 논 것이 야수 자본주의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탐욕스럽게 물고 뜯고 찢는 것이 야수이듯이, 야수 자본주의의 야수들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민중들을 향해서는 항상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흘리며 으르렁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야수들이 지금 고위 공직자들이고 자본가들이며 권력자들이다.


야수들은 가끔 제휴하기도 한다. 마치 아프리카에서 배가 고프면 하이에나와 사자가 같이 먹이를 먹는다. 문제는 그 제휴와 연대의 대상은 그들 서로이지 순박한 초식동물들이 대상은 아니다. 서로 제휴하는 목적은 참을 수 없는 욕망(허기) 일뿐, 언제든 표변하여 서로를 공격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죽이지는 않는다. 피차 손해가 크다. 오로지 목표는 초식동물들이다.(우리 정치 현실과 어찌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는지!!!)


지금 이 땅에는 아프리카 세렝게티 평원의 야만성보다 더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사자나 하이에나는 허기를 면하면 대부분 공격을 멈추지만, 이 땅의 야수들은 결코 충족되지 못하는 허기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끝없이 공격하고 끝없는 야수성을 드러낸다. 이 끝없는 욕망과 허기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장치가 국가다. 하지만 그 국가 시스템의 핵심인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심지어 지키는 부류들 모두가 야수들이라면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아프리카 평원의 풍경은 늘 100m 위에서 볼 때 아름답다. 바닥에 발을 붙이는 순간 피의 향연이 있고 그 대상이 곧 우리일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상대적인 가치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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