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익균형,
어제는 아이들을 데리고 하동 녹차 체험을 다녀왔다. 그저 봄날 아이들에게 녹차밭을 구경시켜주고 찻잎을 따고 덖어 차를 만들게 하고 싶다는 아주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이 시기에 체험을 간 것인데, 정작 녹차 농가 입장으로 볼 때는 썩 달갑지 않은 일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지금 시기에 수확하여 만든 녹차는 일 년 중 최상품(곡우가 20일이었으니 우전차가 지금 시기에 나오는 차다.)으로 이 시기의 녹차 완제품은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런데 아이들이 와서 녹차를 수확하고 그것을 차로 만들어 만든 차를 모두 가져왔으니(물론 약간의 체험비를 드리기는 했지만) 농가 입장으로서는 손해 가는 일이 분명하다.
이런 와중에도 체험을 하게 해 주신 ‘하동 주민 공정여행놀루와협동조합’의 조문환 대표님과 한밭제다 이덕주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의 체험과 즐거움을 위해 혼신을 힘을 다하신 오동수 실장님, 양지영, 전윤환, 김명희 PD님께 고개 숙여 다시 한번 깊이 감사 인사를 드린다.
오늘 아침, 곰곰이 생각해보니 생각할수록 참 고마운 일이고 행복한 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약간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기는 했지만 상호 이익의 균형을 배려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상황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이익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 이익의 상대편에 있는 가치를 살피지 않으면 우리는 한순간 이익의 노예가 된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나라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존재들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자신의 이익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상대의 손해가 있다고 생각하자. 진리에 가까운 논리다. 거의 모든 경우, 이익과 손해를 합치면 제로로 수렴한다. 하지만 세상의 대부분의 일은 이 균형을 위배한다. 거의 무시할 만큼 아주 조금 기울어짐에 대해서는 우리는 일반적으로 관대하다. 하지만 그 각도가 심해질수록 온갖 위계와 음모와 술수가 판을 치는 바람에 손해를 보는 자들은 흔히 손해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마침내 영원히 복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이기도 하다.
2. 차를 마심
정확하지는 않지만 학교 생활을 하면서 누군가를 위해 커피를 만든 시기가 2014년 무렵으로 기억된다. 전체 교직원이 약 20명 내외였던 그 학교에서 나는 아침 일찍 커피를 만들었다.(정확하게 내렸다.) 약간의 곡해와 오해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2019년 8월까지 이어졌는데, 지금 생각해 보아도 하루를 시작하는 거의 최상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2019년 9월 1일부터 혼자 차를 마셔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교장실이라는 독립 공간에서 홀로 차를 즐기는 상상은 언뜻 아주 멋진 풍경처럼 느껴질지 모르나 무릇 차나 음식은 나누어야 제 맛이다. 홀로 즐기고 싶을 때도 가끔은 있지만 같이 어울려야 더 좋다. 9월 한 달은 변함없이 교사 시절처럼 커피를 내렸다. 하지만 선생님들이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10월쯤 눈치챘다. 교장이 너무 일찍 온다는 것과 커피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완전히 행복한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물러났다. 모두 그것을 원하고 있었는지 내가 빠지니 분위기가 좋아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홀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은인은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님이다. 직접 재배하고 만드신 발효차는, 차 맛에 둔한 나에게 은혜로움 그 자체였다. 2년 동안 변함없이 주셨고 그 차를 아껴 먹고 있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엄청난 이야기들로 분화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 이야기할 처지는 아니다. 다만 수많은 생각과 일들의 연속선에서 차는 그 사이의 공간을 차지하는 특별한 존재임에 분명하다.
어제 다녀온 녹차밭에서 봄 햇살 가득 받은 햇차를 마심으로 해서 나는 새로운 세계와 조우하였고 아이들 역시 자신들이 만든 차를 맛보고 느끼면서 역시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을 것이다. 나의 새로움과 아이들의 새로움이 전혀 다른 것이겠지만 삶의 공간에서 새로운 공간의 창조와 그 공간에 대한 경험은, 삶을 풍요롭게 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손해와 아픔을 가늠하게 하는 눈을 갖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