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理

by 김준식
KakaoTalk_20220701_101822315.jpg 아침에 교무실에서 온 빵과 과일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에 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인정 욕구다. 원인을 생각해보면 자신의 태도 혹은 의견을 이해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하지만 나의 상황을 나 자신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데 누군가 그것을 해석, 수긍하고 심지어 인정해준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사람의 심리는 본능과 본능의 통제(교육, 윤리, 제도 등에 의해)가 교묘하게 뒤섞여 있고, 그 위에 주변의 환경적인 상황까지 덧씌워져 있으므로 그 줄기를 잡아 갈래 지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근세 이후, 인간의 심리 분석에 관심을 가졌고 19세기에 이르러 서양에서는 프로이트, 융, 로저스, 에릭슨 등에 의해 의식에서부터 무의식에 걸친 인간 심리의 특징을 아주 일부이기는 하지만 파악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생존은 언제나 어렵고 위험한 과정의 연속이다. 외부의 위험과 어려움도 만만치 않지만 사실 내부의 어려움도 이에 못지않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적 갈등보다는 내적 갈등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경우를 더 자주 보고 듣게 된다. 생존의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종류의 자극을 내부에서 처리하지 못하여 생기는 정신적 고통은 누구라도 한 번은 경험해보는 일이다. 사실 자신에게 그러한 자극과 고통을 부여한 자신의 외부세계는 늘 그곳에 존재하는 것들이었는데 그것으로부터 갈등과 고통을 느꼈다면 그것은 확실히 본인의 심리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하여 우리는 늘 자신의 심리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한다. 매일 자면서 꾸는 꿈으로부터, 일상에서 느끼는 특이한 경험으로부터, 심지어 우연한 자연 현상으로부터 자신과 관련된 조건을 탐색하고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고 믿는) 그것으로부터 내부의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해석을 가하고 그리하여 생성된 결론에 스스로 종속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결론은 대부분 외부의 현상과는 거의 관계없는 스스로의 심리적 토대 위에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이것은 다시 외부와의 갈등요인으로 작용하는 복잡한 역학관계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언제나 발생하고 있다.



한편 심리적 작용의 결과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객관적인 사태에 대한 판단이 개입하게 되는데, 이론적으로는 논리적 체계에 기초한 추론을 거쳐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절차는 가볍게 무시되고 거의 직관에 의존한다. 이성적 추론이 선행하고 직관은 오로지 보조적 수단이어야 맞지만 늘 순서는 반대다. 사태 판단에는 항상 직관의 비중이 절대적이고 이성적 추론은 미미하거나 개입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심리적 작용은 직관이 짜 맞춰 놓은 틀에 재단되고 만다. 거기에 따르는 오류와 그 결과는 오로지 본인 몫이기는 하다.(가끔은 타인에게도 전가된다.)



가상공간에 내 글을 올리는 나의 행동은 인정 욕구가 핵심이다. ‘좋아요’ 숫자는 그 연료이며 ‘댓글’은 turbo엔진을 가동한다. 모든 사태가 종료된 이후에야 문득 공허해진다. 이유는 자명하다. 이성의 추론에 따라 나의 행위(가상의 공간에 글을 올리고 '좋아요'와 '댓글'에 자극 받는)가 사실은 실체 없는 관계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좋아요’와 ‘댓글’에 흔들리는 직관의 바닥에 이성적 추론이라는 냉정함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 추론은 언제나 늦거나 희미하다.



오늘도 이 복잡하고 생경한 심리의 바다를 표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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