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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 마키나

인공지능에 대한 영화

by 김준식

2015년 1월 이때쯤 상영된 영화로 기억한다.


고대 그리스의 드라마투르기(dramaturgy 극작술) 중 deus ex machina(데우스 엑스 마키나)에서 영화의 제목을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 내용도 이러한 이미지를 많이 차용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과 유사한 존재를 창조할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이 이와 같은 인간과 유사한 존재를 창조해낸다면 과연 인간은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1982년에 상영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에서 처럼 반란을 일으키는 인조인간(사실 이 영화가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A.I – 인공지능이라는 표현은 쓰이지 않았다.)의 경우처럼 여전히 인간이 우위에 있는 경우와 1999년 워쇼스키 형제에 의해 창조된 [매트릭스]처럼 정 반대로 인간이 기계의 노예로 살아가는 상황,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바뀐 경우까지 우리는 매우 다양한 상상으로 인간이 창조할 인간과 유사한 존재에 대한 관심을 오래전부터 줄곧 상상해왔다.


어쨌거나 [엑스 마키나]라는 말은 대체로 이런 뜻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특별히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지칭하기도 한다.)에서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종결짓기 위해 극의 절정 부분에서 신(절대자)을 등장시켰다. 이와 같이 서사 구조의 논리성이나 일관성보다는 신의 출현과 같은 외부의 초월적 힘에 의존하여 이야기를 끝내는 경우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일컫는다. 이 영화는 이미 제목에서 모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주인공 프로그래머 칼렙(돔널 글리슨 분)은 우연히(전혀 우연이 아님을 영화 중반부 넘어 알게 된다.) 회사 이벤트에 당첨되어 창업주인 네이든(오스카 아이작 분)의 별장으로 초대받는다.

A.I.에이바

칼렙은 여기서 네이든이 창조한(?) A.I.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 분)를 만나게 된다. 네이든이 칼렙에게 제시한 것은 튜링 테스트(비운의 천재 컴퓨터 공학자 앨런 튜링이 1950년에 제안한 것으로서 기계가 인간과 얼마나 비슷하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기계에 지능이 있는지를 판별하고자 하는 테스트)였다. 하지만 칼렙은 나중에야 튜링 테스트의 당사자가 어쩌면 에이 바가 아닌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네이든은 칼렙에게 에이바의 알고리즘을 설명한다. 영화가 대중에게 제시할 수 있는 메시지로서는 너무 무겁거나 혹은 너무 난해하지만 영화 내부 공간의 이미지로 추론해 본다면 딱히 무리한 설정도 아니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축적된 인류의 모든 지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로봇(A.I.) 스스로 반응과 행동, 기타 상황조차도 추론해내는 방식이 에이바의 두뇌라는 식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현재 생존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행동과 사고방식 또한 이 범위를 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영화는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일상의 논리가 배제된 독립 공간(네이든의 연구소)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마치 주인공 칼렙은 폐쇄 공간 속에 던져진 실험용 흰쥐처럼 보이는데 일반적인 실험에서 관객은 탈출구를 알고 있는 반면, 이영화는 관객조차도 탈출구를 알 수 없는(어쩌면 그런 것은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한) 상황이 되어 주인공과 똑 같이 흰쥐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그리하여 제목처럼 문제를 종결 지을 수 없는 난해한 상황이 전개되고 그 속으로 관객 또한 미궁에 갇혀버리고 만다.


영화 중간중간 보이는 압도적인 자연풍경은, 비록 A.I를 창조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여전히 우리의 의식속에 존재하고 있는 신과 인간이 가진 절대 값의 차이를 보여주는 듯했다. 물론 이 값 또한 인간이 부여했고 또 거기에 인간은 언제나 종속되어 있기는 하다.


영화 공간 내부에 등장하는 그림이 내 눈길을 끈다. 바로 유명한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의 넘버 시리즈다. 폴락은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t) 화가이다. 추상표현주의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작가이며 비평가였던 Robert Coates가 미국의 전후 예술 경향을 이 단어로 표시했는데, 이 단어가 처음 쓰인 것은 1919년 독일의 초현실주의 잡지 Der Sturm(The Storm)이다. 1929년 역시 미국의 비평가 Alfred Barr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연결 지어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추상표현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잠재의식을 회화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조금 더 나아가 초 현실의 내면에 웅크린 인간 내면의 불특정 잠재의식을 표현하려는 잭슨 폴락의 회화는 프랑스에서 automatic drawing(특정 모티브에 의한 회화가 아닌 인간 내부의 극적인 예술성에 따라 그려지는 회화 작업)을 시도한 André Masson, 그리고 독일 출신의 다다 예술의 기수 Max Ernst, 그리고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작가 David AlfaroSiqueiros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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