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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2(2025.7.21.)

by 김준식

7.14일 쓴 '1.편견과 상식' 에 이어서 씀.


2. 중요도 혹은 쓸모


모든 일이나 사태의 중요도는 그것의 결과가 가지는 영향력이나 파급력에 따라 결정된다. 더불어 시급성과 가역성, 그리고 목적 부합성과 함수관계에 있다. 여기서 가역성이 중요도의 요소가 된 것은 되돌리기 어려울수록 더 중요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교실에서 교사로 지내 온 날들 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아이들은 나에게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직업이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장자’에게 중요도는 쓸모를 말한다. ‘쓸모없음’(無用)이 곧 ‘쓸모’(用)라는 논리를 펴는 장자의 의도는 중요도의 기준을 타파하자는 것이다. 기준이 타파되면 돌연 모든 것이 무용해지거나 아니면 모든 것이 유용해지게 된다. 장자의 방향은 우리에게 혼란을 주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것을 무용의 극단으로 몰아갔을 때,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아이들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학교 생활 내내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돌연 무용해졌을 때, 바로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이 아이들이었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개인의 영달을 위해 교육부에 전문직으로 가서 답습으로 일관된, 그리고 주체가 모호한 유용성에만 목적을 둔 교육행정에 치를 떨고 다시 교사로 내려와 아이들과 교실에서 수업을 하며 느꼈던 충만함! 그 순간 아이들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교육에서의 작은 변화와 자긍심을 위해 교장이 되었지만, 학교장으로서 방향성에 혼돈이 왔을 때, 나에게 남은 중요한 것을 다시 고민해 보았다. 역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었다. 학교장 역할이 주는 만족감보다는 일주일에 한 시간, 아이들과 함께 했던 철학 수업에서 더 큰 만족을 얻었고 그것은 교장에서 다시 교사로 돌아와야 하는 당위를 제공해 주었다.


무용의 끝에서 발견한 유용, 즉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은 자신이 가진 유용함을 극단적인 한계까지 밀어붙였을 때 남는 무용함이야말로 가장 유용함,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준비되지 못한 정부의 모습인가? 청문회에 불려 나온 장관 자리에 오르려는 인사들의 불법과 탈법, 오만과 방자함이 도를 넘는다. 진영만 바뀌었을 뿐, 이전 정부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다. 장관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사실 유용성을 위해 평생을 바친 자들이다. 유용하지 못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그들이다. 이 지극한 유용의 결사체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그 유용성이라는 것이 사실은 한 줌의 가치도 없는 것들에서 출발한다. 국민을 위한다는, 그리고 나라를 위한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공허하다. 그들의 행동에 그 어떤 진정성도 발견하기 어렵다.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들이 가진 그 한 줌도 되지 않는 유용성을 내려놓을 때 마침내 지극한 무용함이 나타나고, 그 무용에서 비로소 진정한 유용함, 중요한 그 무엇인가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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