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기와 재현
Mimesis와 Imitátĭo(닮기와 재현)
수업 중에 우리 반 준우(가명)가 물었다. 늘 궁금증이 많은 아이다.
“선생님 어제 저녁 TV 여행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일본 정원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왜 저런 정원이 없습니까?” 일본 정원이 아마 준우에게는 너무 예쁘게 보였나보다. 사실 준우는 매우 안타깝지만 우리 정원을 자세하게 본 적도 없고, 우리 정원의 전형을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준우가 TV에서 본 일본의 정원은 일본 어느 사찰의 여름을 촬영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당장 우리 정원을 보여 줄 수도 없고, 또 일본 정원과 비교할 수도 없으니 나는 준우에게 아래와 같은 아주 장황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일본 전통의 古都인 교토 시내 전통가옥 내부의 정원을 보면 누구라도 기막힌 그들의 솜씨와 어울림에 혀를 내 두른다. 특히 긴가쿠나 기요미즈 사원의 정원은 거의 절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들이 만든 모든 것들은 자연을 기초로 하지만 자연을 그대로 둔 것은 거의 없다.
자연을 모방하기는 하지만 장인의 손이 어느 곳 하나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자연의 재구성이다. 즉, 자연을 그대로 가져와 장인의 손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인공적인 자연을 일본 사람은 진실로 자연이라고 여긴다. 자연을 가져와 특정한 곳에서 축소한 상태로 그 자연을 모두 볼 수 있게끔 만드는 그들의 기술, 혹은 예술 때문에 서양인들은 오래 전부터 일본에 열광했고, 그것은 17~9세기 유럽에 전해져 자포니즘을 형성하게 된다. 이 자포니즘은 우리가 잘 아는 서양화가들(마네, 모네, 고흐, 르누아르 등)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일본의 방식을 우리는 Imitátĭo(재현, 모방, 흉내)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의 예술은 일본에 비해 빈듯하고 심지어 약간은 무성의하게 보이기도 한다. 졸미(拙美)라는 아주 특이한 미적 기준은 우리 예술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의 가장 오래된 건축예술 중 하나인 불국사 기단 축대(불국사는 조선시대에 재건축되었으나 축대는 통일신라 그대로이다.)로부터 오래된 목조건축의 주춧돌 모양, 그리고 사찰들의 정원, 조선시대 사원들의 정원, 그리고 대한민국 명승지 궁궐의 정원까지 자연적이라는 이름하에 너무 자연스러워 거친 느낌마저 풍긴다. 그러나 그곳에 우리의 정서가 배어 있다. 자연을 그대로 닮아가고 싶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품으려는 우리의 태도가 거기에 있다.
이러한 우리들의 미적 세계는 그저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수사가 없다. 그저 마당 한쪽에 나무 한 그루 문득 심어놓고 가지가 처지든 휘든 그대로 둔다. 이것은 Mimesis(닮기)에 해당한다. 물론 미메시스나 이미타시오 모두가 닮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주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일본 정원에 있는 소나무는 작은 솔가지 하나, 심지어 솔잎 하나 조차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방향을 잡고 목적을 두어 나무를 조정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재구성 하여 새롭게 재현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옳다’ ‘옳지 않다’의 문제는 없다. 단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영원히 근접할 수 없는 민족성이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