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와 기타 집안 대소사를 처리하고 고향 친구들과 잠시 자리를 했다. 같이 교직에 있는 친구가 내 책을 꺼내면서 사인을 해 달라 한다. 그리고 불쑥 이렇게 물어본다. (아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면서 늘 듣는 질문이다.)
“아이들이 잘 알아듣나?"
조금 있다가 이런 질문도 한다.
“중학생들이 철학을 이해하나?"
……
그 자리에서는 그저 웃기만 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한 것을 옮겨본다. 나는 단호히 말했어야 했는데…….
얼마 전 紙面 인터뷰를 위해 쓴 글이다.
“아이들은 제가 하는 이야기를 대부분 알아듣고 이해합니다. 단 조건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먼저 가르치는 제가(교사가) 가르치려는 철학적 문제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어떤 어려운 철학적 문제도 아이들과 수업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수업의 핵심은 나의(교사의) 이해도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고 나의 이해도는 축적된 나의 경험과(學) 실천적 능력이(習) 결합될 때 증폭되며 거기서 다양한 수업의 설계와 방향이 나오게 된다.
30년 이상을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해 오면서 나는 관행적으로 수업을 해 왔다. 공모 교장이 되어 중학생에게 철학수업을 하기 전까지 나는 고등학교에서 해 왔던 나의 수업에 사실 엄청난 자부심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 유능한 교사라고 자부했고, 당시 아이들도 대충 그렇게 인정하는 듯했기 때문에 정말 그런 줄 알고 지낸 세월이었다.
하지만,
중학교 아이들에게 철학수업을 하려고 마음먹고 지난 세월 고등학교 아이들에게 수업했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수업을 시도해보았더니 돌아오는 것은 철저한 무관심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무서운 무관심이었다.
이유는 있다. 고등학교에서 수업할 때 내가 가진 무기는 시험성적이었다. 중간, 기말 평가와 나아가 대입 수능까지…… 아이들에게 이 만큼 강력한 무기는 없다. 수업하는 아이들 대부분은 이 무기에 영향을 받는다.(영향을 받지 않는 아이들도 가끔 있다.)
하지만 중학교 철학수업은 이 무기가 없다. 시험을 보지 않는 수업은 사실 교사에겐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큰 무기가 없는 것이다.
무엇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인가?
2020년 5, 6월은 아이들 마음을 잡기 위해 지난 30년 동안 수업의 동기 부여와 관련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효과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좌절의 연속이었고 동시에 포기하고 싶었다.
“교장이 수업한다는 뭔가 있어 보이는 관심을 포기하면 될 일 아닌가?”
슬그머니 수업을 그만두어도 사실 아무도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냉소적인 평가만 따를 뿐.
2020년 2학기가 되면서, 아이들에게 교사인 내가 철학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들이 나에게 먼저 아무 이야기나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수업을 진행하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장난 삼아 하는 어떤 사소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고 내가 대답하고 또 확산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2학기 내내 아이들과 함께 그들의 아주 사소한 이야기를 수업의 주제로 삼아 철학적 이야기와 연결시키는 놀이를 했다. 아이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와! 제 이야기 속에 그런 뜻이 숨어 있는 줄 몰랐어요!”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교사로 살아온 지난 30년을 다시 돌이켜보며 때론 그 세월이 큰 힘도 되고 때론 그 세월 속에 엄연히 존재하던 오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교장 임기는 1년이 남았다. 중학교 철학 1권을 끝내고 2권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혼돈 속이다. 여전히 방향을 알 수 없는 캄캄한 밤길을 아이들과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다. 사실 이 과정이 거의 철학이 아닐까 싶다.
친구에게 패북의 글로 대답을 대신한다. 참 그 친구는 페북을 하지 않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