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동안 출장을 다녀왔다. 꼭 그 장소에서 그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있을까 싶었지만 여러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늘 신선한 자극을 준다.
오늘 아침 00은 중앙 현관을 통해 출입했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제도 중앙현관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기다림의 효과일까? 아직은 예단할 수 없다. 다만 오늘은 그 일로 00과 조금 불편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칭찬을 듬뿍 해 줄 수도 없는 일이다.(이제 규칙을 지키기 시작했으므로)(관련 https://brunch.co.kr/@brunchfzpe/1385)
원칙이나 규칙을 따지며 00을 급박하지 않아서 생긴 일인지, 아니면 또 저러다가 다시 이전과 같은 일이 반복될지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다. 다만 아침에는 내가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00이 이틀 만에 보네!”라고 이야기하며 맞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주 복잡한 세상이라 규칙이나 원칙은 매우 중요하다. 규칙이 무너지면 원칙도 무너지게 된다. 한 번 무너진 원칙이나 규칙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더 엄격하고 더 포괄적인 원칙과 규칙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수많은 법들이 있고, 그 법 아래로 더 많은 명령과 규칙이 존재한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이런 법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만 한다.
노자께서는 이런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다.
공맹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이 말을 본다면 뭔가 잘못된 말일지도 모른다. 仁義야말로 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고, 仁義야 말로 道인데 그 큰 도가 사라져서 생긴 결과로 仁義가 있다니……
하지만 노자는 생각이 다르다. 큰 도(즉 大道)는 사람 사는 세상에 필요한 구체적 행동 지침(仁과 義)이 있기 전에 이미 우리의 세상을 아우르는 크고 완전한 가르침(즉 大道)을 말한다. 그 큰 가르침이 사라지면서 생겨난 것이 곧 ‘仁義’라는 것이다. 즉 仁義는 사람들이 살면서 이룬 세상(즉 두 사람 이상이 사는 세상 - 仁)을 중심으로 규정된 규칙과 질서, 나아가 신분이나 계급에 맞게 움직이는 질서(즉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도리 - 義)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것은 노자 당시나 지금이나 모두 그 기준이 애매한 탓에 해석의 여지가 생기고 그 해석에 따라 각각의 입장이 생겨나니 仁義야 말로 사실은 인간의 삶을 어지럽게 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침에 00의 중앙현관 출입의무는 어쩌면 너무나 사소한 규칙이다. 매일 그것을 어기다가 어제오늘 규칙을 지킨 00을 보며 ‘仁義’와 ‘大道’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