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타인의 작은 불행이 나에게 안도를 주는 이 비인간적인 마음이 참으로 못마땅하다. 그러나 분명 나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인간의 이 기막힌 심리 때문에 조금 복잡해지는 일요일 밤이다.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주말,
친구가 있었다. 같은 동네에 태어난 친구이자 먼 혈족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살아오면서 이념의 차이는 매우 큰 사이라 평소 자주 만나지는 않는 그런 친구가 있다. 조상 대대로 천석 지기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그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대학원에 진학하여 독일로 유학을 다녀와서 몇 해 시간강사를 하다가 30대 후반에 지방 국립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나와는 너무나 다른 인생행로가 된 것이다.
그 친구를 고향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 나이에 가정 문제로 이혼을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위에서 말한 상대적 안도감을 희미하게 느꼈는데 참 스스로 한심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타인의 불행에 대한 반응의 기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먼저,
사람 사이는 결국 이익형량이 지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즉, 나와 관계가 돈독한 사이는 내가 그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으로부터 더 많은 뭔가를 획득할 수 있는 관계일 때, 돈독함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 뭔가는 꼭 물질적이지 않아도 좋다. 정신적 안정이나 만족감, 행복함, 편안함, 동의, 인정, 수긍 등 그 무엇이든 그 상대방이 내게 주는 것이(내가 그에게 주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많을 때 그 상대방에게 나는 돈독함을 느끼게 되는 모양이다. 아마도 이 경향은 결국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물적 본능의 존재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다음,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각자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가져야 하는데 그 영역의 범위가 겹치거나 또는 현저하게 영역의 범위 차가 나서는 절대로 동등한(결국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의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상대이거나 내가 그의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라면 벌써 관계 형성에서부터 위계가 생겨나게 되고 그 위계는 서로의 신뢰와 존중의 메커니즘을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와 그 친구는 관계는 어떠한가? 나는 그로부터 어떠한 정신적 물질적 원조를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친구는(그의 말에 의하면) 나로부터 가끔씩 정신적 위로를 받는다고 했는데 이런 상황이 50년 이상 유지되어 온 걸 보면 아마도 우리 사이에는 분명 희미하지만 이익형량의 관계가 있기는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수평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신뢰와 존중은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있다. 이미 그와 나는 다른 영역에서 자신 만의 넓이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 사이에는 위계가 있을 리 없다.(일반적으로 존재하는 교수와 교사의 위계는 논외로 하자.) 그러니 신뢰도 존중도 미량이기는 하지만 분명 있기는 있다. 그렇지만 이 신뢰와 존중은 무관심에 가까운 것이어서 극단적으로 누가 어떻게 되든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으로 인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저간의 사정을 종합해보면 나와 그의 관계는 희미한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는 하지만 완전한 수평관계를 유지하지는 않는 관계인데 이런 바탕에서 그의 이혼 소식은, 다만 내가 그러하지 않음에 대한 위안과 안도의 느낌만 있을 뿐, 어떤 동정이나 걱정도 내게서 찾을 수 없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든 나의 비인간적인 모습, 그리고 결국 본능에 충실한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적지 않게 실망하지만 분명히 그것이 나라는 존재이고, 동시에 이 범위를 넘는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하여 이 주말이 끝나가는 밤, 담담히 자신을 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