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자'와 '보편자'로서의 ‘학교’
'개별자'와 '보편자'에 대한 수업이 거의 끝났다. 아이들도 나도 사실은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혹은 구조적으로 아이들보다 조금은 덜 희미한 교사인 내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번 수업 시간은 앞의 배운 내용을 토대로 글쓰기를 해야 하지만 주제가 주제인지라 글쓰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아이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현재의 상황을 이해시켜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방법이 학교 그리기다. '보편자', 혹은 '개별자'로서의 학교를 아이들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학교를 그리게 했다.
Q. 우리 학교 그려요?
A. 우리 학교도 좋고 네가 생각하는 학교도 좋아.
Q. 학교를 다 그려요?
A. 다 그려도 좋고 일부만 그려도 좋아.
Q. 나가서 그려도 돼요?
A. 그럼!
이 답이 나오자마자 아이들은 우르르 운동장으로 나갔다.(다음 주 수업 시간에 해석의 시간을 가지기로 한다.)
아이들이 그려서 제출한 ‘학교’를 본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보편자’와 ‘개별자’가 섞여있었다. 이를테면 아이들이 그린 학교 속에는 ‘보편자’로서의 학교도 분명 존재했다. 물론 그 ‘보편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거기에는 수많은 다양한 개입 요소가 있으므로 이런 해석 자체가 모호해질 수 있다.)
아이들에게 ‘보편자’로서의 학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으로 한정한다면) 학교의 중앙 현관이 분명하다. 물론 이것은 범위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 문제도 여기서는 잠시 논외로 하자.) '개별자'로서의 학교는 아이들이 보는 학교의 다양한 모습이다. 즉 각각의 아이들에게 보이는 학교는 '개별자'로서의 지수중학교이다.
동일한 '개별자'이지만 아이들이 보는 시선은 각자의 몫이다. 이것은 《중학교 철학》 맨 앞의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보는 것’은 주관이다. 한자 ‘볼 視(시)’는 ‘보일 示(시)에 의지를 표현한 ‘볼 見(견)’이 더해진 글자다. 즉, 내가 나타나 있는 대상을 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본다는 것이다. 단순히 보이는 것을 넘어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려는 글자가 ‘볼 視(시)’다.
반대로 내게 ‘보이는 것’은 객관이다. 내가 보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타나 있는 자연 현상이 ‘보일 示(시)'다. 나의 의지와는 거의 무관하게(또는 타인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는) 배치되어 있는 것들이 우리 눈에 보일 때 ‘보일 示’를 쓴다.” 《중학교 철학》 30쪽
학교라는 독립적이면서 고정된 작은 사태(Sachverhalt)에 대한 각각의 아이들이 가진 각자의 판단과 해석으로 만들어진 학교 그림이 ‘보편자’와 ‘개별자’를 희미하게 익힌 아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다가갈 것인지 다음 시간이 기대된다. 결과물을 가지고 해석하는 시간은 의외로 진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