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지금 대한민국과 비교하며.
2022년, 지금 대한민국과 비교하며.
눈먼 자들의 도시(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22년, 지금 대한민국과 비교하며.
하루에도 수천 번씩 눈을 감고 뜨고를 반복하지만 정작 내가 눈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는 보고, 또 볼 수 있고 그것이 죽는 날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믿고 또 믿으며 한 치의 의심조차 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데 그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도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으나 나는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딸랑 주연 여자 배우‘줄리안 무어’와 남자 배우‘대니 글로버’의 이름만 보고 그저 문학적 또는 상징적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상상과 현실이 만나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그리고 정말 피하고 싶은 불편한 것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의 욕망과 본능이 영화 내내 내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가능한 이야기이므로 더욱 그러했다. 카프카적 요소가 버무려진 이 기괴한 드라마는 영화 내내 나의 심장을 쥐락펴락했다. 그러나 그 속에 흐르고 있는 감독의 시선은 적나라하고 추악한 인간의 내면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몇 개의 영화적 장치들이 영화를 보는 우리들을 참담하게 했다. 가령, 폐쇄 공간(수용소, 각각의 병동, 눈먼 인간의 시선과 그 속에 갇혀버린 내면)과 반대로 주인공은 보이게 하는 교묘한 설정,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세부적 부가 장치들, 맹인들 상호관계와 지배 피지배의 구조 등을 통해 눈멀기 전의 신분, 질서, 윤리, 도덕, 양심 등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피 튀기지 않아도 너무나 끔찍하고 유령이나 귀신이 나오지 않아도 너무나 혐오스럽고 무서운 상황을 영화는, 보이는 단 한 사람의 눈으로 보게 한다.
절망적 상황을 몇 겹씩 겹쳐서 도저히 헤어나지 못할 상황을 설정한 원작자의 상상력은 영화적 설정을 통해 여러 가지 현실 문제로 우리를 안내한다. 공허한 권력에 의한 격리와 수용, 그리고 무자비한 억압,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제어당하는 욕망(식욕, 성욕, 명예욕 등등)의 중첩적 왜곡과 그것에의 순종적 자세, 어눌한 저항, 모순적 위계질서의 분화 등 현실세계에서 눈멀지 않는 자들에게 늘 보는 모든 부조리가 여전히 거기에도 나타난다.
단순히 눈이 멀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영화는 이데올로기의 좌절과 비논리적 상황에 대한 인간의 대처, 불투명한 미래, 관계의 포화와 단절, 억압되어 왜곡된 욕망, 분노의 무 개연성 등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사회적 문제와 교묘히 겹쳐진다.
“현실은 늘 상상 이상으로 끔찍하다”라는 명제를 아마도 감독은 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폐쇄 병동에 뒹구는 쓰레기와 오물(눈이 보이지 않으므로 치울 수도 치우지도 못한다), 그것을 아무런 대책 없이 밟고 지나다니는 벌거벗은 사람들(이미 말했듯이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이미 거기에 없다)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아무런 대책 없이 그리고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주인공(즉 모든 관객)의 시선은 절망, 좌절, 분노보다 더 깊은 무엇일 수밖에 없다.
너무나 적나라하고 불편한 일이었는지 영화를 보면서 내내 “보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을 하고 “깊은 한 숨” “~으 하는 신음”을 내고 있었다. 흑인 배우 대니 글로버는 마지막으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에 대한, 무엇을 위한 “희망”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