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부터 변증의 산맥 중에 또 다른 골짜기인 '중세의 갈등'을 아이들과 이야기해 본다. 처음으로 에라스뮈스 이야기다.
4. 중세의 갈등과 새로운 도전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즉 ‘보편 논쟁’은 유럽의 13~5세기를 풍미했지만 동시에 이미 여러 부분에서 금이 가고 있던 중세라는 구조의 틈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 가속화의 현상들은 유럽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분위기가 달라진 이탈리아와는 달리 유럽의 북부 여러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늦게 르네상스의 분위기가 전해지면서 이 분위기는 곧 종교개혁과 뒤얽히게 된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동시에 몰아친 북부 유럽에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네덜란드의 ‘에라스뮈스’와 영국의 ‘토마스 모어’가 있다.
가) 에라스뮈스[1]
에라스뮈스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신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생아였던 그의 부친은 성직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483년 부모가 전염병으로 죽자 어린 에라스뮈스는 경제적 곤궁에 시달렸고 마침내 1487년 슈타인 수도원에 들어갔고 1492년 사제가 되었다. [2]
1) 우신예찬
정확한 책의 명칭은 “로테르담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가 쓴 어리석음 예찬”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우신예찬으로 불리고 있다. 사실은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다.
책의 서문은 에라스뮈스가 토마스 모어 경에게 보낸 편지로 시작한다. “아마도 이 글을 비판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일부는 교회 학자가 쓰기에는 너무도 가볍다고 힐난하며, 일부는 점잖은 기독교인이 쓰기에는 너무도 신랄하다고 비난할 것입니다.”[3]에서 보듯 에라스뮈스 자신도 이 책의 내용이 당시 분위기에 비춰 볼 때 적절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우신예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신이 말한다’로 시작되는 이 책은 1509년 여름, 에라스뮈스가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의 여행하던 중에 현명한 친구 토머스 모어를 생각하다가 모어의 라틴식 이름인 모루스에서 모리아[4]를 연상하고 그녀의 독백으로 세상을 풍자한다.
바보 여신의 풍자가 독설로 변하는 구절에서 에라스뮈스의 진심이 보인다.
“교회 학자들의 파벌에서 논의되는 문제들은 어찌나 복잡하고 어찌나 난해한지, 만약 새롭게 등장한 이 교회 학자들과 설전을 벌어야 한다면 사도들조차도 또 하나의 성령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5]
이 글에서 에라스뮈스는 당시 교회의 진리와는 무관한 그리고 사람들의 정서와는 무관한 대단히 복잡해진 교의를 비판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피로 세워졌으며, 피로 굳건해졌으며, 피로 성장하였으며, 이렇게 자신의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였던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자신들이 칼을 들어야 할 것처럼 교황들은 전쟁을 불사합니다. 전쟁은 끔찍하기가 짐승이 아닌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며, 시인들이 말하는바 복수의 여신들이 보낸 것이라 할 만큼 미친 짓이며, 세상을 한꺼번에 휩쓸어 가는 역병처럼 치명적이며, 흉악무도한 날강도들이 제일 잘 수행하곤 하는 무법한 일이며,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불경한 일인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들은 다른 것들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오로지 전쟁을 수행합니다. 이 가운데 여러분은 백발이 성성한 교황들조차 청춘의 열정과 힘을 과시하는 것을, 엄청난 비용에 괘념치 않는 것을, 역경과 고난에 지치지 않는 것을, 국법과 종교와 평화와 인간 만사가 모조리 뒤죽박죽 엉망이 되는 것에도 굴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 옆에서 학식을 갖춘 아첨꾼들은 명백한 광기를 열정과 경건과 용기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이 치명적인 칼을 뽑아 형제의 복부를 찌르면서도 그리스도의 크나큰 사랑과 기독교인이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을 찾아내고 있습니다."[6]
십자군 전쟁으로 얼룩진 중세 교회의 혼란과 무 분별함을 서슴없이 비판하는 에라스뮈스의 글에서 몰락해가는 중세를 느낄 수 있다.
에라스뮈스는 교황과 사제들에 대해서도 전혀 관대하지 않았다.
“사제들 모두가 수익을 올리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그와 관련된 법률에 정통하다는 점에서, 그들은 세속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황들은 예배를 통해 금전을 부지런히 모으는 데 바빠 사도의 막중한 과업은 주교들에게 이양하며, 주교들은 사제들에게 이양하고, 사제들은 부제들에게, 부제들은 탁발하는 형제들에게 이양합니다. 그럼 탁발 수도승들은 이를 다시 양털을 깎는 목자들에게 전가합니다.”[7]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에라스뮈스는 종교 개혁에 대하여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루터[8]의 종교개혁 방향에 동의하였으나 [9] 구체적인 방향은 완전히 달랐고 둘은 1533년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으며 이후 에라스뮈스는 루터를 "독사", "거짓말쟁이", "사탄의 입과 기관"으로 표현하였다. [10]
2) 에라스뮈스의 한계
누구보다도 종교 내부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또 비판했던 그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될 것으로 여겨졌으나 사실 그는 그저 강직한 인문주의자였을 뿐이었다. 에라스뮈스는 주로 방랑생활을 하면 지냈는데, 주로 프랑스 파리와 네덜란드의 루뱅, 그리고 영국의 바젤에서 활동했다.
1518년 종교 개혁 국면에서 루터의 과격함에 비위가 상한 에라스뮈스는 지금까지 태도와는 달리 가톨릭 쪽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이후 루터와 여러 면에서 서로 충돌하게 되면서 에라스뮈스는 오히려 반동적 입장을 지켰고 이러한 이유로 유럽 세계에서 에라스뮈스의 위상은 점점 잊혀 가게 되었다. 즉, 중세적 사고로부터 변증법적 발전의 기회를 에라스뮈스 스스로 봉쇄해 버린 것이다.
[1]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네덜란드어: Desiderius Erasmus, 1466 ~ 1536)는 보통 ‘에라스뮈스’로 부른다. 네덜란드 태생의 로마 가톨릭 교회 성직자이자 인문주의자이다. 종교개혁 운동에 영향을 준 기독교 신학자이다. 대표작으로 Moriae encomium(In Praise of Folly 우신예찬, 1511)이 있다.
[2] Erasmus and the Age of Reformation, Huizinga, Johan, Project Gutenberg, 2007
[3] 우신예찬, 에라스뮈스 지음, 김남우 옮김, 열린 책들, 2011.15쪽
[4] 모리아, 모로스 Moros: 우신예찬에서는 바보 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본래 의미는 ‘복을 가져다주는 신’이라는 뜻으로 처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제8권 325행에서 사용되었다. 로마인들은 스툴티티아Stultitia, 희랍 사람들은 모리아라고 불렀다.
[5] 앞의 책, 53쪽
[6] 앞의 책, 62쪽
[7] 앞의 책, 63쪽
[8] 마르틴 루터(독일어: Martin Luther , 1483 ~ 1546) 독일 작센안할트 주 아이슬레벤 출신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인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부패와 잘못된 교황의 권위에 항거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논박하고, 성서가 지니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서의 최고의 권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했다. <위키 백과 참조>
[9] 루터의 종교 개혁 당시 바젤에 체류하며 신교와 구교의 갈등을 중재하기도 했던 그는 신구의 갈등이 격화되자 프라이부르크로 이주했다가 1535년 다시 바젤로 돌아와 1년 후 사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우신예찬, 에라스뮈스 지음, 김남우 옮김, 열린 책들, 2011. 3쪽>
[10] 서양철학사, 버트란트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2019. 6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