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중학교 철학수업(67)

by 김준식
L'Eloge_de_la_Folie_-_composé_en_forme_déclamation_(1728)_(14782268725).jpg 1728년 발행 된 불어 판 표지

지수중학교 철학수업(67)


에라스뮈스 우신예찬의 일부를 필사하다.


아이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중 하나가 뭔가를 쓰는 것이다. 가장 싫어하는 것은 당연히 글을 지어서 쓰는 것이고(이것은 어른들도 싫어한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글을 옮겨 쓰는 일이다. 일견 무용해 보이기는 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의 글을 그대로 옮겨 쓰는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옮겨 쓰는 것이 완전히 무용한 일은 아니다.


변증법의 산맥을 오르고 있는 지수중학교 철학교실은 중세 보편 논쟁을 건너 종교개혁의 협곡에 이르렀다. 내가 임의로 정해 놓은 세 개의 능선, 즉 에라스뮈스와 루터, 그리고 토마스 모어의 능선을 우리는 건너야 한다. 그 처음으로 에라스뮈스가 쓴 우신예찬을 공부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이 공부는 전혀 현실감이 없다. 그래서 가능한 한 우신예찬의 내용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다만 왜 이런 글이 쓰였는가에 더 집중하여 에라스뮈스의 삶과 15세기 당시 유럽의 분위기 공부에 더 집중을 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런 저런 일들이 쉽게 파악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태어난 이후로 처음 접하고 그 어떤 사전 준비도 없다. 이를테면 관련된 책을 읽었다거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거나 아니면 그곳에 여행을 가 보았다거나…… 사전 상황이 전무한 가운데 아이들과 나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협곡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신예찬(비록 번역본이지만)의 일부를 필사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즉 15세기 유럽에 살았던 사람이 하는 말투를 일부라도 체험해보자는 의도를 깔고(내용을 익히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단순히 베껴 쓰는 것을 통해 타인의 글을 옮기는 노력이라도 체험해보자는 의도로 옮겨 쓰기를 시작했다.


방법은 이러했다.


먼저 4인 모둠을 만들고, 각 모둠 별로 우신예찬 복사 본을 8페이지씩 주고(페이지 순서대로) 1페이지씩 옮겨 쓰고 쓴 내용을 모둠 내에서 교차 검증하고 모아서 제출하는 방식으로 총 46페이지까지 옮겨 쓰기를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단어나 문장을 이야기해 보게 했더니 의외로 매우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쓰기는 힘들었지만 나름 뿌듯해하는 아이들을 보며(내심 흐뭇했다.) 질문을 칠판에 쓰고 하나씩 설명을 했다. 질문의 내용이 많아 다음 시간까지 이어가야 할 듯하다.


주로 외래어에 대한 질문이 많았고 더러는 그 내용 중에 있는 이야기도 물었다. 이를테면 “미다스 왕의 정체”에 대해 묻기도 하고(우신예찬, 에라스뮈스 지음, 김남우 옮김, 열린 책들, 2011. 20쪽) “생명은 누구에게서 비롯된다고…”를 묻는 아이도 있었다.(22쪽)


의외의 방법에서 얻은 의외의 성과 같아 스스로 흡족해하면서 다음 시간 설명할 내용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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