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0일 오후(1)

by 김준식

2023년 1월 20일 오후 ……(글이 길어서 나누어 올린다.)


학교 석면 해체 공사로 2층 다목적실을 임시로 쓰고 있다. 행정실 식구 3명의 자리와 교무실 선생님들 자리 3개, 그리고 칸막이가 처진 교장 자리가 함께 있는 이 공간이 처음엔 어색하더니 갈수록 정이 간다. 함께 있어 온기도 느껴지고 가끔은 이야기도 주고받으니 사람 사는 느낌이다.


오전엔 연말 정산 하신다고 선생님 3분이 나오셔서 모처럼 이야기 꽃을 피워 좋았는데 일이 끝나 선생님들이 가시고 나니 다시 적막해졌다.


2022년에 출판한 중학교 철학 1권에 이어 중학교 철학 2권을 쓰고 있는데 지지부진이다. 반을 넘겼지만 진척이 더뎌서 조금 집중했더니 머리가 지끈하다. 자료를 찾아보아야 하는데 임시 거처이고 도서관 공사 중이라 자료를 볼 수가 없어 오후에는 책 쓰기를 멈췄다.


대신 2월 중순, 모 사찰에서 할 예정인 화엄형이상학(의상의 법성게를 중심으로)과 라이프니츠 강의 준비를 위해 원고 정리를 해 본다.


1. 라이프니츠의 단자론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1646년 7월 1일 독일 중서부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라이프니츠의 아버지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 그가 여섯 살이었을 때 죽었지만 라이프니츠에게 배움에 대한 열의는 심어놓았던 것 같다. 라이프니츠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일곱 살 때였지만 독서를 통해 독학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아무도 그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지 않아서 그는 여덟 살 때 혼자 힘으로 라틴어를 익혔다.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라틴어로 쓰인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보고 여러 책과 대조하여 마침내 글자의 뜻을 해독하여 로마사를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의 서재에서 광범위한 배움을 얻게 되었다.(사실 이 시기의 책 대부분은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논리학에 대단한 흥미를 느끼고 있던 라이프니츠는 14세의 대학에 입학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과정을 5년 만에 마쳤지만(1661∼1666) 라이프치히 대학은 박사 학위 수여를 거부하자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 대학(1666-7)으로 옮겨 알트도르프 대학의 교수들의 경탄 속에 빼어난 성적으로 박사 학위 시험에 통과했다. 학위를 취득하자마자 스물한 살에 불과한 그에게 교수직이 제의됐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라이프니츠는 대학 교수직이라는 속박을 원치 않았고 보다 더 넓은 세계와 접하고, 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보다 더 활발히 교제함으로써 대전환기를 맞는 시대의 문제들과 직접 대면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그는 법학에만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그는 곧 철학적 문제들에 부딪혔다. 당시 철학은 목적론에 바탕을 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이제 막 발흥한 기계론에 바탕을 둔 데카르트 철학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2. 단자론 개관


개개의 사물은 모두 자신에 내재해 있는 힘인 ‘활력의 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화한다. 이 ‘활력의 점’이 단자(모나드)다. 모든 단자는 살아있다. 따라서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살아있는 생명체다. 자연 전체는 모나드(생명)로 가득 차 있고 그 단자들은 모두 다르다. 눈의 보이는 현실의 진정한 실재는 살아있는 ‘활력의 점’으로서 단자인데, 이 ‘활력의 점’의 속성은 ‘표상’과 ‘욕구’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단자(모나드)에 대한 이야기의 역사는 매우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기원전 6세기 피타고라스로 시작하여 파르메니데스 크세노파네스, 그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단자에 대한 개념이 이어져 왔다. 마침내 이집트 태생의 기독교 철학자인 플로티노스가 하나인 존재(One) · 제1 존재(First Being) · 전체 존재(Totality of All Being: 모든 존재의 총합인 존재)로서의 신(God)을 지칭하기 위해 모나드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단자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근거로 하여 키워내야 한다. 따라서 단자는 당연히 다른 단자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단자는 그 무엇이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할 수 있는 창문이 없다. 단자는 완벽하게 자족적이다. 그런데 개개의 단자 안에 온 세계가 현존한다. 개개의 단자는 살아 있는 영원한 우주의 거울이고 그 자체로 작은 우주다. 아니 그것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한, 그것은 하나의 작은 신성이다. 이 부분은 의상의 법성게의 내용과 통하는 면이 있다.(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후술)


의상은 통일 신라 시대 선덕 여왕 치세의 인물로서 왕족 출신이다. 그가 중국으로 간 이야기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의상과 원효) 중국에 가서 중국화엄종 제2대 조사인 지엄至嚴에게 배우고 그 배움의 결과를 7언 30구 210자로 된 법성게法性偈로 정리했다. 법성게法性偈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공부하고 그 경전의 핵심 내용을 적은 게송(불교계에서 불교적 교리를 담은 한시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대방광불화엄경은 부처께서 모든 경전을 설하고 거의 마지막에 이야기한 것으로서 매우 방대하고 어려운 경전이다.


단자는 과거를 간직하고 있으며 미래를 잉태하고 있다. 이런 단자들은 예정조화(elle harmonisera)에 의해 상호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런 예정조화의 체계는 단자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상호 조화시키고 정돈해 주는 어떤 정신(애매한 용어이기는 하다.)이 요구된다. 이 정신이 바로 신神이다. 신은 위대한 수학자처럼, 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정확히 계산하고 개개의 단자에 내면적 법칙을 기획해 전체의 모든 단자가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한다.


3. 화엄경과 단자론


1867년 미국 출신의 반삼위일체론 계통의 기독교 신앙을 가진 초월주의 신학자이자 독일 문학이론가인 Frederic Henry Hedge가 라틴어를 영어로 옮긴 단자론 7의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7. There is also no intelligible way in which a Monad can be altered or changed in its interior by any other creature, since it would be impossible to transpose anything in it, or to conceive in it any internal movement—any movement excited, directed, augmented or diminished within, such as may take place in compound bodies, where there is change of parts. The Monads have no windows through which anything can enter or go forth. It would be impossible for any accidents to detach themselves and go forth from the substances, as did formerly the Sensible Species of the Schoolmen. Accordingly, neither substance nor accident can enter a Monad from without.


요약하자면, 단자의 내부는 다른 피조물에 의해서 어떠한 변질과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단자의 내부는 어떠한 것도 장소를 이동시킬 수 없으며, 내적인 운동을 일으키는 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단자를 인도하거나 증가시키는 외부의 힘도 없다. 단자에는 드나들 수 있는 창이 없다. 어떠한 실체나 속성도 단자 밖에서 단자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법성게 7~8번째 구절을 보자.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즉,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다.


의상이 생각한 ‘하나(一)’와 라이프니츠의 ‘단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의상의 ‘하나’는 외부와 단절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순환적이다. 반면 라이프니츠의 ‘단자’는 창이 없으므로 외부와 단절이다. 뿐만 아니라 라이프니츠의 ‘단자’는 부분이 없다고 가정한다.(단자론 1. The Monad, of which we shall here speak, is merely a simple substance entering into those which are compound; simple, that is to say, without parts.)


이것은 6의 이야기처럼 (they cannot begin except by creation, nor end except by annihilation, 단자는 오직 창조에 의해서 생기고, 멸절에 의해서 파괴된다.) 기독교적 신의 완전성에 기초한다.


이것은 사실 의상의 ‘하나’ 와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다만 의상은 순환을 통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라이프니츠는 단절된 완전함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의상의 ‘하나’는 ‘하나’이자 동시에 ‘전체’다. 부처 그리고 의상은 인간의 마음을 ‘하나’로 가정한다. 그런가 하면 라이프니츠는 신의 상황에 기초한 완전성으로서의 ‘단자’를 이야기하는데 인간의 상황을 가정한 의상의 법성게와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시작하지만 기이하게도 중간중간 교점이 발견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