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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an 26. 2023

친구의 전화를 받고……

친구의 전화를 받고 세상을 보니……


1. 

언젠가 이 페북에서 대학 교수인 나의 친구 이야기를 잠시 한 적이 있다. 오늘 오후에 그 친구 전화를 받았는데 한 2년 정도 현 정부(대통령)의 일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이야기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모 국책연구소에 발령이 날 예정이라면서…… 자랑이 분명하다. 어쩌라고!(다행히 그 친구는 페북을 하지 않는다.)


나야 축하한다는 말 외에는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한 때 이 친구와 정치적 노선 문제로 다투기는 했지만 다 옛날이야기가 되고 만 지금, 그저 '축하하네!'라고 짧게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2.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과 시류에 영합하는 문제도 생존 이후의 문제이지 생존의 문제와 우열을 다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엉터리 같은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20세기 서양의 실존주의가 어쩌면 ‘장자’적 사유로부터 출발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장자’가 생존했던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언제 어디서든 징집되어 죽음의 전쟁 판에 내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찬가지로 실존주의도 세계 대전을 거치며 그 어떤 문제보다도 실존의 문제를 넘는 것은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장자’는 새로운 주장을 편다. 바로 '무용지용'의 논리다. 즉, 쓸모의 잣대를 버리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가장 큰 잣대가 유용성, 즉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 일 것이다. 여기서 쓸모란 道를 향한 기준들인데 세상을 모두 이해하고 남음이 있을 정도의 진리나 그 진리를 깨닫는 것, 초월의 신비한 경지로의 끝없는 행진이다.(우리가 아는 쓸모와 조금 차이도 있지만 의미로 볼 때 사실 거의 불가능하고 또는 처음부터 그런 경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그리고 그 쓸모가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나름대로 애를 쓴다. 쓸모없는 인간으로 평가받는 일은 우리에게 늘 치명적인 기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쓸모가 없어지면 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장자』 ‘인간세’의 후반부는 ‘쓸모’에 대한 이야기다. 장석이 만난 사당나무와 남백자기가 상구 땅에서 본 커다란 나무는 인간들에게 별 쓸모가 없었던 까닭에 오랫동안 잘리지 않고 살아왔다. 사당나무는 ‘장석’에게 ‘너나 나나 같은 物인데 나의 쓸모를 판단하려 하느냐’며 꾸짖고, 남백자기는 쓸모없는 나무에서 신인을 본다. 쓸모없는 나무도, 그리고 神人도 인간에게는 쓸모가 없다. 그러니 이 ‘쓸모’라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히려 송나라 땅 형씨 지방의 쓸모 있는 나무들은 그 '쓸모' 때문에 이미 재난을 겪었고, 이마가 흰 소나 코가 들린 돼지들과 같이 제사에도 못쓰는 동물들이 행복하게 천수를 누린다. 


인간도 마찬가지! ‘인간세’에 등장하는 ‘지리소’는 그 지리멸렬한 생김새 덕분에 징집되지도 않고 부역도 면제받으며 곡식과 장작을 지원받으며 일상을 잘 살아간다. 나무나 동물, 인간의 몸에 이어 마음의 덕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인간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논리다. 


‘장자’가 ‘인간세’에서 비판하고자 한 것은 유가의 군자가 도덕적 설득을 통해 악한 군주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유가적 관념이다. 이것처럼 허무 맹랑한 이야기가 있는가? 하고 ‘장자’는 코웃음을 친다. 유가에서 ‘공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단적으로 표현된 곳은 『논어』의 자로 편에 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한다면,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하겠다.” 

자로가 말했다. 

“그런 게 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두우십니다. 어떻게 이름을 바르게 한다는 말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유(자로)는 거칠구나(참 못 배웠구나)! 군자는 자신이 모르는 것은 버려두는 것이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않고,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법이 들어맞지 않게 되고, 법이 들어맞지 않으면 백성들이 어찌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군자가 이름을 바르게 하면 말을 할 수 있고, 말을 하면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군자는 자신이 하는 말에 구차함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논어』 ‘자로’


‘공자’에게 있어 너무너무 중요한 ‘이름’이나 ‘예악’, ‘법’, ‘군자’가 ‘장자’에게는 검불처럼 날리는 정말 사소한 의미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쓸모 있기 위해 공부하고 유세하러 천하를 돌아다닌 ‘공자’와 유가의 지식인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태도를 비판한 것도, ‘인간세’의 마지막에서 ‘지리소’를 통해 덕이 지리멸렬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도 ‘장자’의 그런 태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장자’가 비판하는 것은 단지 ‘유가’만은 아니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것을 모두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지리소’의 등장은 의미심장하다. 당연하게 생각해 오던 세상의 ‘쓸모’를 뒤집기 위해서 ‘지리소’ 만큼이나 충격적인 이미지가 또 있을까?


신체의 쓸모없음을 대변하는 ‘지리소’에서, 더 나아가 덕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광인 ‘접여’를 통해서이다. ‘접여’는 ‘공자’에게 덕으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은 위태로우니 다 그만두라고 한다.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사느라 애쓰지 말라는 것. 한편으로 ‘공자’의 논리를 공격하고 있지만 사실은 ‘공자’의 논리에 ‘장자’적 의미를 부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는 최소한 ‘유가’를 완전히 깔아뭉갤 생각은 ‘장자’에게 없어 보인다. 


그러면서 ‘장자’는 말한다. 이 ‘쓸모’에 집착해 자신의 존재를 수단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쓸모에 집착하는 그 순간 자신의 가치는 지극히 상대적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자’는 끝내 어떤 것이 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논어』를 비롯한 사서삼경, 그리고 유가와 『장자』라는 책의 결정적 차이가 아닐까?


친구의 전화 뒤끝에 너무 생각이 많았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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