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교육

신 학기를 앞두고 인사발령 통지를 다시 보다가……

by 김준식

신 학기를 앞두고 인사발령 통지를 다시 보다가……


논어의 「미자」 편의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 함께 밭을 갈고 있었다.(장저와 걸익은 은자隱者들이다.)


孔子께서 그곳을 지나실 적에 子路를 시켜 그들(장저와 걸익)에게 나루(배가 닿는 곳)를 묻게 하셨다.


자로가 장저에게 나루를 묻자 장저가 말하기를 “저기 수레에서 고삐를 잡고 있는 분은 누구신가?” 자로가 말하기를 “공모이십니다.” 말하기를 “저분이 노나라 공모 이신가?” 자로가 “그렇습니다.” 장저가 말하기를 “저분(공자)은 나루를 알 것이다.” 공자쯤 되면 나루를 알고 있을 것인데 왜 묻는지 모르겠네라는 의미로 비아냥거리는 말투다.


자로가 걸익에게 다시 나루를 묻자 걸익桀溺이 대답한다. “도도한 것이 천하가 모두 이러하니, 누구와 더불어 바꾸겠는가?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피인지사避人之士)를 따르기보다 세상을 피하는 선비(피세지사避世之士)를 따르는 것이 어떻겠는가?” 무슨 엉뚱한 말인가?


무도한 군주 곁을 한 치의 미련 없이 떠나 세상을 주유하고 있는 공자와 같은 피인지사, 다른 하나는 덕치를 실현할 군주를 찾아 헤매는 짓 따위를 하지 않고 은둔하여 사는 피세지사. 즉 장저나 걸익, 즉 자신들이다. 이를테면 이미 천하가 모두 어지러워 변화시킬 수 없으니, 우리처럼 사는 것이 어떤가? 하고 넌지시 떠 본 것이다.


장저, 걸익의 답을 자로가 전해주자 공자가 말한다. “새나 짐승 하고만 세상을 살 수는 없다.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 나는 본래 이 천하 사람들과 함께 무리 지어 살아야 하니, 어찌 사람을 버리고 조수鳥獸와 어울려 살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공자는 역시 피세는 어렵다. 세상 속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 자신의 역량을 펼쳐 볼 요량이다.


느닷없이 논어 이야기는 왜 하는가?


다시 2023년 1학기 인사발령을 살펴본다. 내가 영전 인사를 해야 하는 분들께 마음으로 쓴 작은 글씨라도 보내는 것이 나의 예의다. 화분은 너무 흔하고 또 타인에게 키울 것을 강요하는 느낌이라 몇 년 전부터는 글씨로 마음을 대신한다.


그런데 인사발령 상황을 천천히 보니…… 피인지사와 피세지사의 행보가 내 눈에 보였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교사)는 사람들(학생)과 함께 살아야 한다. 즉 우리는 공자처럼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려는 의도가 있는 피인지사들이다. 즉, 잘못된 사람(그들이 만들어 낸 잘못된 교육과 악습)을 피해 새로운 것을 세우려는 것이다. 자주 실패하여 이상한 사람들도 길러내지만……


잘못된 것을 멀리하고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내고자 나는, 우리 모두는 현재 학교에 있다. 34년 세월 동안 나는 그 길에서 때론 흔들리고 때론 좌절하고 또 때론 뒷걸음질 쳤지만 여전히 그 희망 하나로 힘을 얻고 또 유지해 오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 사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점점 그 길은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이유는 천 가지 만 가지!!


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인사발령(정확하게는 현 교육감 이전의 교육감부터 지금까지)을 보면 거기에는 절묘하게 자리와 세력을 분할하는 판세만 읽힌다. 구체적 인물들이 구체적 자리에 배치된 것은 그들의 능력이나 자질을 교육감이 높이 평가해서겠지만 아무런 이익 형량이 없는 나 같은 피세지사에겐 인사발령의 상황이 마치 ‘장저’나 ‘걸익’의 눈에 보이는 피인지사 공자가 잡고 있는 안타까운 수레 고삐처럼 보인다.


행복교육을 외치고 디지털과 A.I교육을 강조하며 미래를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교육은, 즉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그 모든 이념과 논리를 넘는 거대하고 도도한 흐름이다. 행복, 디지털, A.I, I.B, 미래교육등은 교사가 교실에서 마음을 다해 가르치면서 필요한 사소한 방법 중에 하나일 뿐이다. 학교 현장, 교실의 수업 장면에서 인사발령 통지서에 올라 있는 교장, 장학관, 직속기관장들의 역량이 긍정적이고 선량한 영향력으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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